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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가네이 신 X 아오야마 카논

HEAD FOR A BEAUTIFUL DREAM

Wave. by 구사

* 밴드하자! 의 코가네이 신 연인 드림.

* 원작을 날조한 서사이기 때문에 (고등학생 시절) 이 부분이 불편하시다면 열람을 삼가해주시길 바랍니다.

* 마지막 챕터 ‘몇 번의 여름’ 이후에는 원작과 비슷한 흐름으로 흘러갑니다.

* 썰과 연성 사이의 문체로 서술하여 다소 깁니다. 마지막에 요약해두었습니다.





메모리얼

바다와 인접해있어 어업이 발달한 동네였다. 그리고 유독, 그곳에서 이목을 끄는 한 생선가게가 있었다. “어서오십셔! 오늘은 고등어가 싱싱하다구!” 채 변성기가 오지 않은 앳된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공기를 울렸다. 조그마한 어린 사내아이가 호객행위를 하고 있는, 진귀한 풍경이었다. 그덕에 아이는 생선을 사러오는 아주머니들과 노인들에게 사랑을 듬뿍 받았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피아노 신동이라 불리는 카논이 살았다. 둘은 얼핏 스쳐가듯 마주쳤다. 어떨 땐 손님이었고, 어떨땐 공원을 지나며. 옷자락만 간신히 스치는 사이였다. 그 날이 오기 전까지는.

그녀의 부모는 유별났다. 자식이 처음 출전한 콩쿨에서 대상을 탔다는 이유로 더 좋은 학벌을 위해 이사를 결정했으니 말이다. 하물며 멀리 가는 것도 아니었다. 더 좋은 과외와 학원을 위해 옆동네로 이사를 간다는게 일반적인 상식으로서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사 준비와 포장을 위해 눈코뜰새도 없이 바쁘다며 카논의 어머니는 단골 생선가게에 아이를 부탁했다. 반나절만 봐주면 된다며, 다급하게 등을 떠밀곤 잰걸음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어머니가 가자마자 가게 안에서 호기심에 기웃거리던 사내아이가 다가왔다.

“여어-!”

그 시절 카논은 낯가림이 심했다. 고개를 푹 떨군채 애꿎은 신발코만 바닥에 비비자 되려 사내아이는 활짝 웃었다. “너 부끄럼 많이 타는구나!” 수그러진 시야 아래로 손이 불쑥 내밀어졌다. 그녀는 우물쭈물하며 작고 하얀 손으로 악수를 받았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은 이별을 앞두고 만나게 되었다.

신은 대뜸 카논에게 생선을 좋아하느냐며 물었다. 아무래도 생선가게 아들이라 그런지 생선이 주된 이야깃거리를 이루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맞잡은 손을 이끌고 제 집안으로 카논을 안내했다. 다다미가 깔려있고 작은 마당이 한 눈에 들어오는 집이었다. 카논은 집을 둘러보며 “생선, 그냥 보통…….” 이라 웅얼거렸다. 그는 다행이라 말하며 앉아서 잠시 기다리라했다. 카논은 바닥에 널부러진 CD 플레이어와 앨범 자켓을 슥 훑어보았다. CD다. 그러고 말았다.

처음 먹어본 오챠즈케는 생각 이상으로 맛있었다. 딱 알맞게 익어 부드러이 부서지는 연어가 풍미를 더했다. 카논은 이제 생선을 좋아하게 될 거 같다며 웃었다. 그는 뿌듯해 했다. 어린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요리라고 덧붙였다. 둘은 배를 가득 채우고 마루에 누웠다. 내리쬐는 햇볕은 뜨거웠고 처마 끝에 매달린 풍경은 청량한 파동을 일으켰다. 그러다 문득 신이 음악은 좋아하냐고 물었다. 카논은 피아노라면 잘 친다고 했다. “클래식도 좋지! 근데 이것도 좋다!? 들어볼래?” 라며, 그가 CD 플레이어를 머리맡에 끌어당겼다.

탁, 탁, 탁. 딱딱하게 끊어지는 음 뒤로 묵직한 베이스 소리와 가벼운 일렉트로닉 기타 소리가 겹쳐다. 그리고 휘몰아치듯 연주가 시작되었다. 카논은 난생 처음 접해보는 소리에 깜짝 놀랐다. 클래식을 하는 카논에겐 다소 시끄러울 수도 있었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신이 났다. 카논이 눈을 크게 깜빡이자 신이 씩 웃으며 물었다. “어떠냐? 이게 락이라는거야.” 그야말로 마른하늘에 벼락같았다. 이 아이도, 이 음악도.

청량한 풍경 소리, 찌르르 우는 매미소리, 신나는 밴드 음악, 거품처럼 터지는 웃음 소리가 겹쳐져 카논의 마음에 파도쳤다. 그녀는 락이 좋다고 답한다. 잊지 못할 것이라며.



안녕, 여름

둘의 여백 사이에서 신은 소중한 소꿉친구를 병으로 잃었고 카논은 악보를 찢어발겼다. 친구를 잃었을 땐 정말 슬펐다. 십여년을 함께한 친구였으니 말이다. 모든걸 함께 했다. 신은 그 친구를 제대로 떠나보내기 위해 노력했고 상실감은 곧 무뎌진 줄만 알았다. 그저 안보이게 덮어둔 것도 모른 채. 그리고, 카논은 그만큼 소중했던 음악을 내려놓았다. 무섭게 뒤를 쫓아오는 동생에게 느낀 비참한 열등감은 퇴로로 이어졌다. 카논은 천재 피아니스트를 내려놓고 펜을 들었다. 공부해서 의대를 가면, 다시 나를 봐주지 않을까. 결핍에서 오는 자학이나 매한가지였다.

카논은 문득문득 번아웃이 왔다. 이렇게 해서 나는 뭘 하는걸까. 그러면서도 쓸모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열망은 버리지 못했다. 그럴때면 카논은 귀에 이어폰을 꽂았다. 벼락같던 그 날을 떠올리며, 락을 들었다. 결국 손이 근질근질거리기 시작해 남몰래 베이스를 독학했다. 베이스는 학교 밴드부의 연줄로 몰래 연습할 수 있었다.


혼돈의 중학생을 거슬러 고등학생이 되었다. 중학생이 폭풍전야였다면, 진짜 질풍노도는 고등학생 시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두 사람이 다시 만나게 되는 건, 3학년 때 같은 반이 되고나서였다. 카논은 지난 2년간 반장을 해왔고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도 부반장을 하지 않아 곤란해하자 신이 부반장이 되었다. 그렇게 조례가 끝나고 카논은 사물함을 정리하며 친구들과 인사를 나누는데 창가에 있던 신과 눈이 맞았다. 그는 어색하다는 듯이, 제 목덜미를 매만지며 말했다. “안녕, 아까도 말했지만 코가네이 신이라고 한다.” 그러고는 손을 너른 손을 내민다. 투박하고 굳은살이 많은 손이었다. 카논은 그 악수에 응하며 받아쳤다. “…아오야마 카논이라고 해. 1년동안 잘 해보자.”

둘은 학급 친구에 불과했다. 다만, 반장과 부반장이라는 특수한 관계니까 다른 학급 친구들 보다는 조금 더 붙어 있는 시간이 많았을 뿐이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친해졌다. 그저 그랬다. 카논은 선생님이 내준 숙제를 걷어 교무실에 전달하러 가던 길이었다. 음악실을 지난건 우연이었다. 밴드부가 점심 시간에도 연습을 하는 건 일상이었다. 그러나, 작년에 보컬을 맡았던 친구와 마주친 건 필연이었다.

친구는 카논을 불러세우고 전해줄게 있다며 기다리랬다. 썩 반가운 눈치는 아니었다. 어떡할까, 라며 눈을 굴리는데 때마침 화장실 앞에 서 있던 신이 시야에 들어왔다. 카논은 빠르게 신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공책이 많아서 그러니 같이 교무실에 가달라고 했다. 그녀의 어깨 너머로 그녀를 다급하게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카논은 막무가내로 신의 등을 떠밀었다. 신은 알겠다며 카논의 짐을 받아들었다.

교무실에서 나오자 카논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돌아가고 싶지 않았는지 복도로 향하던 발걸음이 몇 번이고 멈추었다. 그걸 가만히 바라보던 신이 씩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아오야마. 나랑 잠깐 어디 좀 가주라.” 뜬금없는 소리에 카논이 고개를 갸웃했으나 어차피 지금 돌아가면 친구를 마주칠 것 같았다.

그리고 신이 카논의 손을 이끌고 도착한 곳은 옥상이었다. 열쇠는 어떻게 얻었냐고하자 예전에 체육 선생이 옥상 창고에 짐정리 부탁해놓고 안가져갔다고 했다. 신은 벌러덩 드러누웠다. 아, 기분 좋구먼. 그러고는 눈을 감는게 아닌가. 카논이 어색하게 문가에 서있자 “어차피 돌아가기 싫은 거 아니었어?” 라고 물었다. 카논은 쪼르르 신 곁에 다가가 앉았다. 어떻게 알았냐는 물음에 그 정도 눈치는 있다는 답이 돌아왔다. “미안, 나 때문에 괜히 시간 잡아먹었네.” 카논이 그리 말하자 신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누워있던 상체를 일으키며 신이 입을 열었다. “그래서, 아까는 왜 도망쳤냐?” 신은 그녀가 밴드부라는 것도 알았고 애초부터 그 관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신은 자신도 밴드 음악을 좋아한다고 밝혔다. 서로 좋아하는 밴드 이야기가, 음악으로 가득한 이야기가 오갔다. 간만에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이후 둘 사이는 급격히 가까워졌다. 이어폰을 나눠끼고 음악을 듣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날은 신이 오선지를 들고와 제 앞에 앉았다. “작곡도 할 줄 알아?”, “뭐어…. 잘 하는 건 아니지만 연습 중이야.”, “무슨 곡인데?”, “산란기의 연어 같은 곡”, “받아들이기 쉽지 않네.” 그런 시시콜콜한 대화를 하고 이해할 수 없는 음표들을 함께 채워나갔다. 그러면서도 한 편으로 카논은 불안했다. 자신이 이럴 시간이 있는 걸까, 하고. 기껏 베이스까지 그만두었는데 말이다.

시치리 가하마에서 매년 8월 17일. 불꽃 축제가 열렸다. 카논은 신에게 가보고 싶다 말하며, 신은 그럼 같이 가자고 한다. 두 사람은 함께 전철을 타고 시치리 가하마로 향했다. 카논은 해가 사라진 지평선을 가만히 바라보다 안전 방지턱 위에 올라섰다. 신이 위험하다고 말렸지만 이렇게 해야지 잘 보인다고 고집 부렸다. 광활하게 펼쳐진 바다를 바라보면 답답한 마음이 가시곤 했다. 떨어져도 나는 모른다, 라고 말하면서 카논의 가방 끈을 붙잡고 있었다.

신과 가까워질 수록 마음은 까맣게 타들어갔다. 조바심이 났다. 자신이 이래도 되는걸까, 하는 마음마저 들었다. 카논은 걸음을 멈추고 한참 바다를 바라봤다. 불꽃놀이가 시작되었다. 하늘에서 터지는 불꽃을 바라보다, 카논은 마음 속에서 무언가 터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이내 몸을 빙글, 돌리며 “저기, 코가네이 있잖아.” 라고 말하는데 등 너머로 폭죽이 터졌다.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었다. 놀란 카논의 발이 꼬이며 복사뼈가 부딪히고 크게 휘청였다. 신은 카논의 가방을 확 잡아당겼다. 신은 뒤로 넘어졌고 카논은 그런 신 위로 엎어졌다.

문득 정말 큰일날 뻔 했다고, 자칫했다가 또 잃을뻔 했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호흡이 가빠지고 흥분한 신이 “어디 안다쳤어? 그러니까 위험하다고…….” 라고 말하는데 카논이 이상했다. 돌아오는 답이 없었다. 어디 다친건가 싶어 제 품에 안긴 카논의 어깨를 붙잡았다. 고개를 기울이며 어디 다쳤냐고 묻자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역시 음악이 좋아. 이런 식으로 살고싶지 않아.”

신은 카논의 사정을 알고 있었다. 그녀가 지금까지 해둔 이야기 조각 중에 그것도 존재했다. 길이 겹쳐 같이 하교하던 어느 날의 대화가 말이다. ‘괴물처럼 성장하는 동생이 무서웠어. 부모님은 이제 내가 안중에도 없었고. 그래서 피아노를 버렸어. 뭐, 피아노가 재미없어진 것도 사실이지만.’, ‘공부해서 성공하기로 마음 먹었거든.’. 그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었던 기억이다. ‘납득이 안돼. 음악 좋아하잖아?’, ‘아니. 안좋아해.’ 분명, 그렇게 말했던 기억이 거품처럼 떠올라 눈앞에 점멸했다. 신은 카논의 감정이 잦아들기를 기다리며, 살아있다고 말하듯 거세게 오르내리는 등을 토닥여주었다.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카논은 제 집이 시야에 들어오자 신을 돌아봤다. “고마워. 그리고 미안해. 아까 일은 다 잊어줘. 그냥 요즘 좀 피곤해서 그랬나봐.” 횡설수설 말을 꺼내지만, 신의 눈빛이 낮게 가라앉아있었다.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가 싶더니 그가 카논을 바라보았다. “우리 라이브 하자.” 뜬금없는 말에 카논이 당황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농담이지?”, “농담으로 보여? 내가 종종 가는 라이브 하우스가 있거든. 거기 마스터에게 부탁해보면 어떻게든 될거야.” 내내 조용하더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나, 카논은 진짜 이상한 애라고 생각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신이 씩 웃으며 말하길. “좋아한다면 음악. 그럼 하면 되는 거 아냐?”


그 날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너무 놀랐고 아직 허황된 이야기라고 생각해서 그랬다. 다음날이 되면 거절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지만, 악보를 들고 해사하게 웃는 그를 보면 입이 다물어졌다. 완성된 악보를 들여다보는데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가있었다. 그건, 그만이 봤을 표정이었다.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 신이 연습은 언제할까, 라고 물었다. 기타도 섭외했다고 신나서 우다다 말을 꺼내는 그를 카논이 저지했다. 곧 있으면 2학기 중간고사도 있으니까. 나중에 이야기하자고 둘러댔다. 신은 머쓱해하더니 알았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결국 또 도망치고 말았다. 그러나 그녀의 손가락은 어느새 신이 그려낸 오선지 위의 음표를 따라 책상을 두드리고 있었다.

둘은 평소처럼 같이 하교를 했다. 유난히 걷고 싶은 날이 있었다. 아니, 꽤 자주 있었다. 신과 함께면 항상 그랬다. 카논은 신에게 잠깐 바다를 들렀다 가자고 했다. 신도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녀는 모래사장을 걸으며 진짜로 공연을 할 거냐고 물었고 신은 당연하다고 바로 답했다. 카논은 걸음을 멈추고 두 발자국 먼저 앞서 걷는 신을 바라보았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왜 그렇게까지 필사적인데. 속에 담아둔 말이 모질게 튀어나왔다. 신은 그저 덤덤한 얼굴로 답했다. “너라서.” 걸음을 좁히며 그가 다가왔다. 카논은 한뼘정도 높은 눈동자를 마주보았다. “네 음악을 듣고 싶어서. 그러니까 이번엔 도망치지 마. 절대로.”

카논은 그 뒤로 연습에 몰두했다. 그래, 한 번 해보자는 셈이었다. 학업도 놓지 않았다. 오히려 근 몇달 중 가장 컨디션이 좋았다. 몸은 힘들었지만 마음껏 연주를 하니 기분이 좋았다. 녹슨 팔을 제대로 움직이기 위해서 피나는 노력을 했다. 그때 신의 친구라는 레이도 처음 만났다. 처음엔 한 마디도 못하고 신 뒤에 숨어서 어버버하던 그가 이젠 곧잘 장난도 치고 티격태격한다. 중간고사가 지나고 가을이 지나, 겨울의 초입이 다가왔다. 라이브 가능한 날이 하필 수험 전 주였다. 신은 걱정했지만, 카논은 괜찮다고 했다. 공연날은 금방 다가왔다.

공연 당일. 꽤 많은 사람이 객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모두가 긴장을 했었다. 긴장했냐고 묻는 신만이 태연해보였다. 너는 별로 긴장 안한 거 같네, 라고 하자 신은 손을 바지에 문지르며 엄청 긴장했다고 한다. 그 모습에 결국 웃음이 터졌다. 뒤에 선 레이도 온갖 호들갑을 떨었다. 이상한 영어로 조합한 구호를 외치고 스테이지에 올랐다.

자신이 사랑했던, 그 CD 속 음원처럼. 스틱이 세 번 부딪히고 베이스가 나직하게 깔리면 일렉 기타가 미끄러지듯 들어온다. 처음엔 좀처럼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긴장이 되었고 실패할까봐 두려웠다. 그러다 진짜로 실수가 났다. 노드를 깊게 누르지 못해 완전히 다른 소리가 났다. 숙였던 고개를 들어 레이를 쳐다보았다. 레이는 아랑곳 하지 않았다. 괜찮다는 듯이, 정말 아무렇지 않아보였다. 그녀는 등을 돌려 신을 바라보았다. 드럼을 두드리는 신은 실로 기뻐보였다. 누가봐도 음악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카논은 관중을 둘러보았다. 엉성한 음악이지만 다들 손을 흔들며 호응해주고 있었다. 타들어갈 것 같은 그 스포트라이트의 열기가, 사람들의 눈빛이, 파도치듯 너울거리는 그 손짓이. 모든게 감동을 넘어 황홀하기까지 했다. 사람들이 자신을 봐주고 있었다. 이 무대에서, 우리들이 주인공이었다.

연주가 절정을 지나 후반에 들어서자, 그녀는 한가지 결심을 했다. 그의 곁을 떠나야 겠다고.


엉망진창에 엉터리 아마추어 연주였지만 그들은 행복했다. 그렇게나 깐깐하던 레이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인사를 하고 스테이지에서 내려와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뒷풀이를 했다. 노래방도 갔고 좋아하는 밴드 곡도 많이 불렀다. 하루종일 밴드 얘기만 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행복한 하루였다고 자신할 수 있을 만큼.

대망의 수험. 카논은 문제지를 받았다. 다 아는 문제였다. 손이 술술 움직이다, 이내 멈추고 말았다. 몰라서 그런게 아니었다. 내가 이걸 왜 해야하지? 하는 의문이 들어서였다. 결국 카논은 펜을 내려놓았다. 신에게는 잘 봤다고 얼버무릴 예정이었다. 자신의 각오를, 서프라이즈로 들려줘야겠다고. 벌써부터 신이 났다.

졸업식이 다가왔다. 차디찬 겨울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누그러지고 생그러운 봄이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울음과 웃음으로 가득한 교정을 바라보았다. 카논의 졸업식에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 그건 조금 서운했지만, 어쩔 수 있나. 미운털 제대로 박혀버렸는데. 카논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러나 마음만큼은 홀가분했다. 멀리서 신이 졸업장을 흔들며 다가왔다. 곁에는 레이도 함께였다. “벌써 졸업이네. 시간 빠르다.” 신도 교정을 돌아보았다. 우리는 이제 성인이었다. “어이, 거기 기념일인데 특별히 이 몸이 사진 한장 찍어줄게!” 레이의 허세 가득한 말에 우리는 피식 웃었다. 그렇지만, 싫지는 않았다. 벚꽃이 흐드러지는 교문 앞에서 어깨를 맞대었다. 어색하게 손가락을 V자로 만들어 웃었다. 폴라로이드로 두 장을 인쇄해 서로 나눠가졌다.

한참 어디갈까, 하고 이야기를 하는데 레이는 자기는 빠지겠다며 어깨를 으쓱였다. 커플 사이에 끼는 거 아니라는 둥, 이상한 말을 하는 바람에 신과 카논에게 혼났다. 낯간지러운 말 듣기 싫다고 도망가는 레이를 보다 우리는 자연스레 모래사장으로 향했다. 가는길 내내 함께 했던 추억의 발자취를 밟아갔다. 여기선 이랬지, 저기선 저랬지. 하며. 모래사장을 걸으며 신은 카논에게 물었다. “이제 뭐 할거냐?”

침묵이 일었다. 카논은 그저 바다를 바라보았다. 신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그녀를 되부르려고 하는 찰나에 입이 열렸다. “떠날거야.” 청천벽력같은 소식에 신이 눈을 크게 떴다. “일단 다른 지역의 라이브 하우스를 돌고 돌거야. 어디 한 곳에 머무르는 곳 없이.”, “괜찮겠어?”, “이제는 괜찮아.”, “네가 괜찮다면 괜찮겠지, 나도.” 그럼에도 서운하다는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카논은 홀가분하다는 듯이 맑게 웃었다. “고마워. 네가 아니었으면 나는 없었을 거야, “종종 놀러와. 맛있는 참치회 썰어줄테니까.”, “아, 그건 좀 그립겠다.” 둘은 잔잔하게 웃으며 그런 대화를 주고 받았다. 카논은 자신의 블레이져 두번째 단추를 뜯어 신에게 건넸다. “나 잊지 말라고 주는 거야.” 신은 그 단추를 왼손에 꼭 쥐었다. 카논은 그를 올려다보았다. “너랑 있던 이 1년이, 내 인생에서 최고로 행복한 순간이었어. 잊지 않을게, 나도.” 그러자 신이 헝클이듯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었다. “그래. 건강해라.” 자, 이제 송별회를 하러 가볼까. 하고 그가 앞서 걷기 시작했다. 카논은 그 뒷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입속으로 되뇌었다. 안녕, 나의 여름아.

그 뒤로, 카논에게서 연락이 오는 일은 없었다. 그야말로 한 여름 밤의 꿈이었다.



몇번의 여름

그 이후 3년이 지났다. 둘은 23살이 되었다. 신은 레이와 함께 OSIRIS 라는 밴드를 꾸렸고 카논은 오랜 용병 생활을 하다 여성 4인 밴드 rêve에 합류하였다. 오시리스는 메이져 데뷔의 문턱까지 갔지만 보컬인 쿄의 돌발 행동으로 무산되었다. 카논이 속한 레브는 아직 메이져 데뷔를 하지 못했다.

다시 여름이 왔다. 청춘 밴드들이 한 곳에 모이기 시작했다. 그건 바로 뮤직 패스티벌, 비기닝 R이었다. 아마추어 밴드들이 나와서 공연을 하고 우승자를 가리는 패스티벌이었다. 이런 행사는 보통 짜고치는 경향이 많아, 내부적으로 우승자를 정해둔 상태일 것이다. 그러나 오시리스는 우승을 노리고, 레브는 그저 자신들의 노래를 알리기 위해 이 행사장에 모였다.

레브의 무대는 행사 초장에 끝났다. 끈적끈적한 땀을 손등으로 닦아내리며 무대 뒤의 대기실로 향했다. 복도를 지나는데 스태프가 등 뒤에서 외쳤다. “오시리스 스탠바이 해주세요!” 그 한마디에 카논이 뒤를 힐끔 돌아보았다. 제 뒤 따라오던 레브의 드러머와 보컬 사이로 대기실에서 나오는 금발의 밴드맨이 얼핏 보였다. 긴 머리를 낮게 묶어 늘어트린 남자. 그리고 그 사내를 따라나오면 불만을 토로하는 흑발의 남성. 오시리스라고 했던가.

맨 앞을 걷던 기타리스트가 카논의 팔을 쭉 잡아끌며 왜그러냐고 물었다. 카논은 등을 돌리며 “그냥 뒤가 좀 소란스러워서.” 라고 했다. 뒤에 있던 드러머도 앞을 보면서 걸으라고 덧붙였다. 어서 짐 정리하고 다른 공연들도 보러 가야했기에 레브는 걸음을 서둘렀다. 그리고 그녀들이 모퉁이를 돌자, 대기실에 남아있던 밴드맨이 마저 나왔다. 시원하게 울리는 목소리가 얼핏 들린 것도 같다. “가자, 쿄.”


정리를 끝마치고 나오자 마침 오시리스의 무대가 준비되어 있었다. “오시리스래.”, “아 얼마전에 뭐 메이져데뷔 물건너간 밴드?” 그리 말해도 카논은 크게 관심이 없었다. 레브 전원이 용병출신이었기에, 그런 소문에 귀가 밝은 것 뿐이었다. 카논은 무대를 바라보았다. 커다란 스크린에 보컬의 얼굴이 비추었다. 그리고 베이스의 얼굴을 비추었다. 모르는 얼굴이었다. 밴드가 많다보니 모든 밴드를 기억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데, 그 다음에 비추어지는 인물은 도저히 잊을 수 없는 인영이었다.

금발의 사내. 아까, 대기실에서 나오던 그 아이. 레이였다. 신과 가장 친했던 레이. 심장이 거세게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비추어지는 신의 모습에 카논이 넋을 놓아 안전바를 붙잡았다. 카논의 행동을 보던 밴드원들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카논? 하고 불렀지만 그 소리를 닿지 않았다. 같은 밴드를 좋아했고 지금의 자신을 존재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 아이. 아지렁이가 일렁이는 해변을 보듯 일순 정신이 아득해져있었다. 조금 표정이 어두워보였지만, 역시나 드럼을 좋아하는구나. 보컬이 마이크를 내려놓고나서야 연주가 끝났음을 알아차렸다. 카논은 몸을 돌려 곧장 대기실이 늘어진 무대 뒤의 복도를 내달렸다. 등 뒤에서 밴드원들이 그녀를 불렀지만 멈추지 않았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이미 떠났으면 어떡하지. 우왕좌왕 하는데 때마침 대기실 문이 열렸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금발의 남성, 흑발의 남성이 나왔다. 보컬이 세 번째로 나오고 마지막으로 신이 나왔다. 밭은 숨이 기침이 터지듯이 입가에서 흩어졌다. “신!” 간만에 혀 위에 올려본 이름이 파도처럼 부서졌다. 그 외침이 복도에 쩌렁쩌렁하게 울리며, 스태프마저 카논을 돌아보았다. 카논은 곧장 신에게 달려갔다. 레이가 “너는…!” 하고 놀라긴 했지만 말이다. 신 역시 마찬가지로 당황한 듯 보였다. “카논?” 이름의 퍼즐이 혀끝에서 맞추어졌다. 그가 불러준 이름이 낯설었다. 어른이 된 그의 모습도 낯설었다. 고작 3년이었는데. 그 3년동안 그리웠던 그라서. 카논은 앞뒤 가리지 않고 그의 품에 뛰어들었다. “안녕!”

지나버린 우리의 계절에게, 그 시절의 우리에게, 지금의 우리에게, 안녕.

그리고 다시 마주한 여름에게 또 안녕.




몇번의 여름이 가도 너는 다시 왔어

이젠 놓치지 않을 거야

/TOIL, Gist - 몇 번의 여름





이외

  • 주요 테마: 여름 바다

  • 신과 카논은 어릴때 일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 신은 카논이 남자아이라 생각했고(당시엔 머리가 짧았다) 카논은 세월이 오래 흐르다보니 기억이 퇴색되어 그가 누구인지 떠오르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소리만큼은 선명히 기억에 새겨져 있다고.

  • 신의 감정 터닝포인트는 학창시절 그 바닷가. 도저히 눈을 뗄 수 없는, 위태로운 녀석이라고 처음 느꼈다. 사랑은 때론 연민의 형태를 하고 나타나는지도 모른채. 지금은 반짝거리는 카논의 모습에서 눈을 뗄 수 없다는 의미로 바뀌었다.

  • 카논이 연락하지 않은건 굳게 먹은 마음이 약해질까봐 그랬다고. 다시 돌아가서 어리광부리고 너랑 함께 밴드를 하고싶다고 할 거 같아서.

  • 신은 문득 카논이 그리워지면 그녀가 건네고 간 단추를 매만졌다. 그럼 그녀가 어디선가 잘 살고 있을 거라는 안도감이 들었다.

(신이 수행을 떠나기 전에 카논에게 자신의 귀걸이 남은 반쪽을 건네준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였다. 이게 있으면, 어디서든지 우리의 소리가 이어져있는 거라고.)

  • 밴드연습하면서 이름으로 부르게 됨.






요약:

1. 어렸을 적에 카논이 신이랑 한 번 만난적이 있고 그때 밴드 음악을 접하게 됨.

2. 신은 친구를 잃었고 카논은 피아노를 더이상 치지 않게 됨. 공부에 집착하지만 우울할땐 베이스를 연주함.

3. 고3때 같은 반이 되었고 밴드를 좋아한다는 공통점에 더욱 가까운 사이가 됨.

5. 시치리 가하마에 놀러가, 바닷가에 안전 방지턱 위를 걷던 카논이 넘어질뻔 함. 그러면서 쌓아둔 마음 속 응어리가 한 번에 터져나오며 음악이 하고 싶어. 이렇게 살고 싶지는 않아. 라고 함.

6. 신이 카논을 위해 자신이 아는 라이브 하우스에서 공연을 하자고 함. 그리고 작곡부터 모든걸 연습해서 겨울에 성공적으로 엉터리 라이브를 올림. 그렇지만, 재밌다고 생각. 사람들이 자신을 봐주고 있다는 것에 희열을 느낌.

7. 졸업을 하고 카논은 아예 잠적을 타버림. 소리소문없이, 애초부터 없었던 사람처럼.

8. 23세. 각자 밴드맨으로서 자립을 하고 있다가 비기닝 R에서 재회하게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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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귀여운 알파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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