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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체 뺏기(약 5만8천자)

해피엔딩+심리묘사+소소한 일상+개그 빼앗김 ㅠㅠ

1차 by 마닥 1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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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가 부제목에 적힌 것들을 뺏어줌으로써 시작한 1차 창작입니다. (자캐놀이~)

이 글에 나오는 모든 등장인물/배경/사건은 전부 픽션입니다. 현실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혹시 맞춤법 틀린 부분이 있다면 얼마든지 지적해주세요. 감사합니당.


비극적 로맨티스트 (가제)


“그대들의 사정도 잘 알고는 있네.”

그리핀 자작은 지저귀는 새들의 목소리를 등지고 소파에 나란히 앉은 두 사내를 바라보았다. 두 사내의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그 이유는 그리핀 자작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이 권유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명령은 두 사내를 불안하다 못해 불쾌하게 만들고 있으니까. 그중에서도 유독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던 달트리 자작은 불타는 속을 식히려는 듯, 이미 식어버린 홍차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전혀 귀족 답지 못한 모습이었지만, 지금은 그 누구도 말을 얹을 수 없었다. 옆에 앉아 그를 지켜보던 바이스 남작은 고개만 숙인 채, 그러면서도 정확히 달트리 자작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곳에 제가 있다는 것 자체로도 참 행운이라 생각하고 있답니다.”

“…….”

“저의 의견은 감히 표현할 수 없을 것 같군요.”

그리핀 자작의 눈썹이 꿈틀거렸으나 이내 제자리를 찾았다. 기막힌 명령에 기분이 상할 수도 있었을 터였다. 친분이 있는 상급 귀족과 오래 지낸 상태라면 자신의 위치를 잊고 대드는 경우도 간혹 있었다. 그러나 그는 참으로 이성적인 판단을 내렸다. 두 사람을 모두 존중하는 태도를 보이면서도 어디까지나 자신이 배려하는 사람은 달트리 자작이라는 걸 보여주고 있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그리핀 자작의 감상이었기 때문에 남작이 정말로 그런 지는 알 수 없었다.

달트리 자작에게 온 시선이 모여들었다. 그는 머리를 감싸 빈 컵잔을 바라보았다. 컵 바닥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그는 제 아들도 분명 이런 표정을 짓겠지,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들었다.

“이미 7년이나 지났단 말이오.”

“7년이면 참으로 길게 느껴졌겠소.”

“내가 어떤 성격인지 잘 알고 있지 않나?”

그리핀 자작은 코웃음을 쳤다. 그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입꼬리를 내렸다.

“잘 알고말고. 그러는 그대는 어떻소? 발독 백작님과 이야기를 나눠보겠소?”

그의 말에 달트리 자작은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리핀 자작은 기세등등하게 턱을 쳐들고 있으면서도 슬쩍 바이스 남작의 얼굴을 보았다. 역시나 표정 하나 흔들리지 않은 모습이었다. 이미 예상했던 일이겠지. 하긴, 그렇기 때문에 바이스 가문은 꽤 위험한 집안이라는 인식이 있던 것 아니겠나? 언제나 기회를 바라보는 사냥꾼의 집안.

달트리 자작은 말없이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바이스 남작도 조심스레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사람 다 겉옷을 챙겨 입고 있으니 그리핀 저택의 메이드 3명이 나타났다. 한 메이드가 탁상 위에 놓인 찻잔들을 치우는 동안 다른 두 메이드는 자연스럽게 응접실의 문 옆에 서서 손님들이 다가오기만을 기다렸다. 이 공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동안에도 저택의 주인은 가만히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방을 나설 준비를 마친 두 사람이 문에 다가가자, 메이드들은 양쪽에서 문을 당겨 그들이 나갈 수 있게 도와주었다. 앞장선 달트리 자작이 멈춰 서더니 그리핀 자작을 뒤돌아보았다. 그제야 그리핀 자작은 의자에서 일어났다. 나름의 배웅은 해주겠다는 의미였다.

“한 가지만 묻겠소. 그대의 아들에게는 이 이야기를 전했나?”

그는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되도록 그를 쏘아보고 있자 달트리 자작은 한 번 웃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우리 아들이 오랜만에 놀러 오고 싶어 하겠군. 둘은 좋은 친구 아니오.”

“……그렇지.”

“생각할 시간은 주시오. 이건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니.”

그러더니 짧은 대화를 인사 대신으로 하고, 두 사내는 집사의 안내를 받으며 모습을 감추어버렸다. 혼자가 되어버린 그는 한숨을 푹 쉬며 소파에 눕듯이 앉았다. 그가 고독함을 즐기고 있는 찰나, 방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비서의 목소리였다.

“어르신. 잠시 괜찮으실까요?”

“……무엇이지?”

대답은 하였으나 반응할 생각은 없었기에 그대로 누워있었다. 그러나 이어서 들려오는 비서의 말에 그는 두통이 밀려왔다.

“도련님께서 찾으십니다.”

그는 또 한 번 한숨을 내쉬고는 자세를 바로 해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러면서 밖에 있는 사람이 잘 들을 수 있도록 크게 말했다.

“앤드류에게 방에서 기다리라고 전해주게. 내가 그쪽으로 가겠소.”

“알겠습니다.”

이내 구두 소리가 복도에서 울리는 것을 들으면서 그는 창문에 다가갔다. 시간이 꽤 지난 줄로 알았건만, 오늘의 손님들은 막 마차에 타고 있는 참이었다. 그는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고 나서야 중얼거리듯 말했다.

“나도 방해하고 싶지는 않았소, 친구.”

집사에게 감사 인사를 건넨 두 사내는 마차 안에 들어가 출발하기만을 기다렸다. 이내 마부의 외침과 함께 마차가 흔들리기 시작하자, 조용했던 실내는 요란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아까 전부터 입을 굳게 닫고 있던 바이스 남작이 이내 굳어 있던 표정을 풀고 태연하게 물으며 말했다.

“역시 그리핀 가문의 압박감은 대단하군요. 방문할 때마다 긴장하게 되는 곳입니다.”

“그럼, 우리 저택은 편하다는 소리인가?”

“하하. 그만큼 자작님이 좋은 분이라는 소리 아니겠습니까.”

“오, 이런. 오해하지 마시오. 화가 난 게 아니니까.”

잠깐 동안 웃음소리가 마차 안을 울렸으나, 다시금 쇠 바퀴가 흙과 부딪히는 소리만이 들렸을 뿐이었다. 평소에는 귀를 기울여 본 적도 없던 마차 소리가 오늘따라 전쟁터 속 총소리로 들려왔다. 차창을 통해 밖을 바라보던 바이스 남작이 기어코 이 전쟁터에 총 한 발을 더 쏘고야 말았다.

“이번 건은 이야기할 게 많겠군요.”

“꼭 그 이야기를 꺼내야겠소?”

“어차피 해야 할 이야기니까요.”

남작은 자신의 코트 안쪽 주머니에서 곱게 접은 사진을 한 장 꺼내어 펼쳤다. 바이스 가문의 가족사진이라는 걸 알아챈 자작은 그를 혼자만의 시간 속에 두기로 했다. 그래야 자신도 홀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남작이 말했던 것처럼 해야 할 이야기이긴 했다. 그러나 그건 두 사내의 대화가 아닌 가족 간의 이야기가 필요했다. 자작은 눈을 감고 자신의 오랜 친구의 표정을 기억해 냈다. 타인의 고민에 거만한 태도를 보이는 그 모습도, 그러면서도 자신의 문제에는 애써 외면하던 모습도 전부 기억해 냈다. 그는 언제부터인가 그런 인물이 되었다.

“결국 이건 백작님께서 만들어낸 거대한 문제가 될 것 같군요. 그렇지요?”

그는 눈을 황급히 뜨고 남작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온화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주제는 그다지 평화롭지 못했기에 자작은 무심코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말투만큼은 농담조였다.

“문제가 되겠소? 사실 선택지는 정해져 있지 않나. 그대도 원하는 대로 하시게.”

“저는 달트리 자작님의 말씀을 따를 겁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요?”

달트리 자작은 두 눈을 끔벅이며 상대방의 표정을 유심히 관찰했다. 조금이라도 농담이 섞여 있기를 바랐으나 아무래도 진심인 모양이었다. 그는 미간을 손끝으로 피며 다른 손으로는 그를 막아섰다.

“아니, 그대에게도 선택지가 있지 않나. 그대의 의지를 따르게.”

“하하. 그것이 자작님의 선택이라면요.”

“어허, 농담이 아니야. 난 진심으로 하는 말이라고.”

“저도 진심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우리의 의지가 아니라 자식들의 의지겠죠.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는 저의 안위보다도 자식들의 마음이 더 소중합니다. 자작님도 그렇지 않나요?”

그는 미처 대답하지 못했다. 자식이 소중하지 않아서 그랬던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나도 소중한데 그를 상처 입힐 결말을 생각하니 속이 불편할 지경이었다. 문득 마차 밖이 어두워졌다는 것을 느끼고 차창 밖을 보았다. 울창한 숲이 에워싸서 만들어낸 터널을 지나고 있었다. 이 기나긴 숲길을 지나고 나면 이제 저택이 나타나겠군. 달트리 자작은 등받이 기대어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바이스 남작도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나뭇잎들을 바라보았다.

“오늘은 피곤하실 텐데 눈이라도 붙이시지요.”

그의 말에 벗을 두고 잠들 수는 없다고 대답했다. ……아니, 대답한 걸까? 입이 움직이지 않았던 것 같다. 깊게 들이마신 숨은 어느새 규칙적인 호흡이 되었다. 흔들리는 마차 속에서 그는 천천히 눈꺼풀을 내렸다.


화창한 하루의 오전. 해가 뜬지 몇 분조차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평범한 저택이라면 지금쯤 고용인들이 분주하게 청소나 식사 준비를 하고 있을 터였다. 그러나 달트리 가문의 저택은 조용했다. 들리는 것이라고는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바람이 만들어내는 소리,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 그리고 그 새들을 쫓고 싶어 안달이 난 짐승의 울음소리. 그 외에는 들리지 않았다. 이는 분명 불면증에 시달리는 자작 부인을 위한 모두의 배려였다.

아무리 아침이 늦는다고 해서 모두가 잠들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조용히 방에만 있을 뿐, 이미 침대에서 일어나 새로운 아침을 맞이한 이들도 있었다. 그중 한 명이 바로 달트리 가문의 맏아들인 케네스 달트리였다.

일찍이 목욕을 마친 그는 자신의 긴 머리카락을 빗질하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의 방에서는 유독 정원이 눈에 잘 들어왔는데, 그중에서도 케네스는 정원 끄트머리에 있는 홍차 밭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른 아침이었기에 아직 아무도 없었다. 손을 바쁘게 움직이면서도 그는 문득 자신의 연인이 해준 말을 떠올렸다. 잠에서 깨기 어렵다는 고민을 말했을 때의 답변이기도 했다.

‘그럴 때는 홍차가 어떤가요? 홍차 중에는 잠을 깨기 위해 블렌딩된 차가 있답니다. 쓴맛이 강하기는 합니다만, 잠에서 깰 때는 정말 효과가 좋지요.’

그는 빗을 내려놓고 입을 가리며 하품을 한 번 하였다. 밖에 있던 공기가 산뜻한 덕분에 정신이 멀쩡해지기는 했으나 이왕 떠올린 거 한번 마셔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문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나지 않도록 천천히 열었다. 복도에는 드물게도 사람 발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내밀어 복도를 보았다. 저 멀리에 사람이 다가오고 있었다.

“어? 형!”

케네스의 동생, 스파이크가 큰소리를 내어 다가왔다. 혹시라도 어머니가 일어나실까 싶어 급하게 손을 들고 그를 막아섰다. 스파이크도 아차 싶었는지 손으로 입을 막은 채로 몸이 굳었다. 형제 모두 저택에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형에게 다가가 밝게 인사했다.

“웬일이야? 벌써 일어나고.”

“난 원래 이 시간대에 일어나. 그나저나 뛰지 마라. 큰소리도 내지 말고.”

“이렇게 일찍 일어난다고? 근데 계속 방에 있던 거였어?”

“내 말 좀 들어라.”

스파이크는 해맑게 웃으며 벽에 기대어 섰다. 가끔씩 보이는 동생의 자유분방한 모습이 케네스의 눈에는 못마땅하게 보일 때가 있었지만, 오늘은 그런 것쯤 신경 쓰이지 않았다.

“아침 일찍 일어나면 뭐해? 형은 산책도 자주 안 나가잖아.”

“글쎄. 명상?”

스파이크가 과장하는 얼굴로 그럴 리 없다고 말하자마자 그는 손가락을 튕겨 그의 이마에 한 대 날려주었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스파이크는 소리를 지르지도 못하고 주저앉아버렸다. 케네스는 그런 동생의 모습을 보면서 슬쩍 웃었다. 이제 분명 왜 웃냐고 뭐라 하겠지?

“아이, 지금 때려 놓고 웃는 거야?”

“그러니까 형 말 좀 들어.”

“뭐?”

이제 그게 무슨 상관이냐고 화내겠지? 케네스는 그렇게 예감하고 눈을 감아 들려올 말을 기다렸다. 그러나 생각과는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놀라서 동생을 바라보니, 그도 그새 아픔을 잊고 놀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둘은 누가 말한 건가 싶어 주변을 둘러보았고 의외로 가까운 곳에 그 목소리의 주인이 있어 다시 한번 놀랐다.

“도련님들? 이러다가 어머님이 일어나시겠어요.”

“아, 죄송합니다…….”

케네스는 조심히 방 안으로 들어가다 말고 다시 복도로 나왔다. 스파이크가 본인의 방으로 떠나는 걸 지켜보고 있는 메이드를 불렀다.

“실비아 씨. 혹시 홍차에 대해서 잘 아시는지?”

“기본적인 종류는 알고 있습니다.”

“그럼, 홍차 좀 부탁해도 될까요? 비비안 말로는 잠에서 깰 때 좋은 차가 있다고 하던데.”

“브렉퍼스트 말이군요? 금방 준비할 테니 기다려주십시오.”

재빨리 복도를 지나 계단을 내려가는 그를 보고 나서야 문을 살짝 열어두고 방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자신이 완전히 잠에서 깼다는 걸 깨닫고 쓴웃음을 지으며 의자에 앉았다. 그는 첫 번째 서랍을 열어서 비비안, 그러니까 자신의 연인과 주고받은 편지 묶음을 꺼냈다. 동생에게는 말하지 않은 사실이지만, 실은 그는 아침에 눈이 떠지면 곧잘 편지 내용을 다시 읽고는 했다.

편지를 몇 장이나 읽었을까? 노크 소리가 들려 그는 들고 있던 편지지를 책상 위에 올려두고 서둘러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아까 불러 세운 메이드가 손에는 진하게 우려낸 홍차를 들고 서있었다. 그는 홍차를 건네받고 감사 인사를 하려는데 메이드가 살짝 웃으며 소곤소곤 말했다.

“이건 도련님에게만 말씀드리는 겁니다만.”

“네?”

그는 방에 들어가다 말고 멈춰 서 그의 말에 귀 기울였다.

“오늘 바이스 남작님께서 오신다고 하더군요.”

케네스는 반가움에 한껏 눈을 크게 떴다. 표정으로 무언가를 숨기는 데에 서툴렀기에 메이드는 그의 마음을 쉽게 읽을 수 있었다. 그는 웃음기 섞인 말로 이어 말했다.

“주인님과 집사장님께서 하신 말씀이니 분명 오실 겁니다. 비비안 아가씨께서도 오신다는 말씀이었죠.”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메이드는 조용히 방문을 닫고 나갔다. 케네스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의자에 앉았다. 아직도 따끈따끈한 홍차를 한 모금 입에 넣자, 쓴맛이 빠르게 퍼져나갔다. 그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으나, 그는 그 씁쓸한 맛을 싫어하지 않았다.

찻잔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어지럽게 올려놓은 편지지를 하나씩 모아 정리했다. 하나도 빠짐없이 정리한 케네스는 서랍을 열고 편지지를 집어넣었다. 그러면서 서랍 가장 구석에 들어있는 반지 케이스를 손에 들어 열어보았다. 안에는 산 지 며칠 지나지 않은 반짝거리는 다이아몬드 반지 한 쌍이 푸른빛을 내고 있었다. 케네스와 비비안이 사랑하는 색이었다. 그 반지를 한참이나 지켜본 그는 고개를 흔들며 케이스를 닫았다. 그에게 건네기에는 이른 감이 있었다. 원래 있던 곳에 되돌려 놓은 케네스는, 조금은 식어버린 홍차를 한 모금 더 들이켰다. 홍차는 여전히 씁쓸한 맛이었고, 그는 여전히 그 맛이 좋았다.

시간이 지나 달트리 저택의 식구들은 아침 식사를 마치고 각자의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특히나 자작 부인은 스파이크와 함께 기르고 있는 부엉이들을 확인하러 갔다. 케네스는 자신의 아버지로부터 손님이 언제 오는지를 확인하고, 그들을 맞이하기 위해 최대한 자신이 할 수 있는 단장을 했다. 아마 이 모습을 동생이 보았다면 다시 과장된 표정을 지으며 놀렸을 것이다. 그런 시답잖은 생각을 하면서 그는 집사장과 함께 저택의 대문 앞에 서서 손님이 오시는 것을 기다렸다. 단정한 자세로 가만히 그들이 오기만을 기다렸는데, 집사장이 슬며시 케네스에게 기대듯 다가갔다.

“도련님. 그렇게 껴입으시면 아무래도 더울 텐데요?”

“아직 초봄이지 않습니까.”

그렇게 말하면서도 케네스는 왼손으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한 줌에 쥐어올렸고 오른손으로는 약하게 바람을 만들어 목덜미를 식혔다. 당연한 말이지만, 부채질한다고 해서 완전히 시원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자신의 말과 행동이 충분히 모순적이라는 판단이 들어 그는 멋쩍게 웃었다.

“확실히 많이 껴입긴 했나 봅니다.”

집사장은 그 말에 거의 덤비다시피 대답했다.

“그렇지요? 손님의 대접은 제가 할 테니 도련님은 걱정하지 마시고 방으로…….”

“하하,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더우면 겉옷을 벗으면 되는 일 아닙니까.”

그의 재빠른 대답에 집사장은 말끝을 흐리며 다시 그에게서 거리를 두었다. 케네스는 시큰둥한 얼굴을 하면서 집사장의 표정을 흘겨보았다. 무언가 안절부절못한다고 해야 하나? 눈치를 보는 듯한 느낌이 행동에서 다 드러났다. 이런 경우는 대부분 그가 어떤 비밀을 감추고 있었다. 고민에 입을 한 번 꾹 닫은 케네스가 결심 끝에 몸을 돌리고 섰다.

“뭔가 숨기는 거라도 있는 겁니까?”

“예? 무얼 말입니까? 제가 도련님께 무얼 숨긴단 말입니까.”

그런 것치고는 너무 가만히 있지를 못하는데. 케네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집사장을 의심이 가득 찬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이윽고 집사장은 그의 시선을 피해 저 뒤쪽을 보며 외쳤다.

“이런 얘기를 할 때가 아닙니다, 도련님. 저기를 보십시오! 바이스 남작님의 마차가 옵니다.”

케네스는 단박에 뒤를 돌아 저 멀리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그의 말처럼 멋진 망토를 두른 말 두 마리가 마부의 지시에 이끌려 사각형의 마차를 끌고 달려오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의심 따위는 얼른 잊고 자세를 고쳐 똑바로 섰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차는 서서히 속도를 줄였고 마차의 문은 정확히 손님을 기다리던 두 사람의 앞에 멈춰 섰다. 집사장이 멈춰 선 마차의 문을 열자, 안에는 바이스 남작이 자신의 코크햇을 손으로 잡고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했다. 집사장이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기다렸습니다, 남작님. 오시는 길 어디 불편하지는 않았는지요?”

“그럼요. 이렇게 맞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남작은 곧 뒤에 서 있던 케네스를 발견하고, 인자한 미소를 띠며 한 손을 건네 악수를 청했다. 케네스는 당연히 남작의 손을 맞잡아 공손하게 인사하였다.

“케네스 경, 못 본 사이에 더 어른이 되었군요.”

“농담도 참. 지난주에도 뵙지 않았습니까.”

“농담이 아닙니다. 정말로 더 어른스러워졌는걸요. 우리 딸도 더 어른이 된 것 같지 않나요?”

뒤를 흘끗 보는 남작을 따라 케네스도 마차 쪽을 보았다. 그의 시선 앞에는 붉은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트린 아름다운 여성이 집사장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마차에서 내린 참이었다. 남작이 눈빛으로 케네스에게 시선을 주자 그는 자연스럽게 여성의 눈앞에 섰다. 그리고 예의 바르게 한 손을 건네며 인사했다.

“비비안. 이 먼 곳까지 오느라 고생이 많았소.”

“어머?”

비비안은 그를 발견하고 눈을 빛내며 손을 맞잡았다. 케네스는 살며시 웃는 비비안을 보며, 역시 바이스 남작과 똑 닮았다는 생각을 문득했다. 케네스는 비비안의 손을 꼭 잡고 조심히 그를 자신의 쪽으로 이끌었다. 비비안도 그 손길을 따라 케네스의 앞에 가까이 다가갔다.

“마중 나와 준 건가요? 고마워라.”

“그대가 온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어떻게 방에서 기다리고만 있었겠소.”

케네스의 말에 그가 자신의 붉은 생머리를 귀에 넘기며 얼굴을 붉혔다. 그는 밝게 빛나는 비비안의 은빛 눈동자가 사랑스럽다고 생각했지만, 이 감상은 마음속에만 간직하기로 했다.

벌써 둘만의 세상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좋은 분위기에 있는 두 사람을 보며 바이스 남작은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옆에서 그들을 지켜보는 집사장에게 달트리 자작이 있는 곳으로 안내를 부탁했다. 그는 저택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두 젊은이에게 전했다.

“저는 자작님과 이야기를 좀 나누어야겠습니다. 케네스 경과 비비안은 잠시나마 담소라도 나누시지요. 이야기가 정리되면 금방 부르겠습니다.”

둘은 고개를 끄덕였다. 남작이 집사의 안내를 받으며 안으로 들어간 것을 확인한 케네스는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그래, 지금이라면 정원에 아무도 없었다. 분위기도 화사하고 좋지 않은가? 그는 비비안의 손을 잡고 정원이 있는 쪽으로 손을 살짝 당겼다. 저쪽으로 가서 이야기를 나누지 않겠냐는 무언의 신호라는 걸 알고 있는 비비안은 웃으면서 요청에 화답했다.

두 젊은이는 정원을 가장 아름답게 볼 수 있는 정자에 마주 보고 앉았다. 케네스는 기분 좋은 바람을 느끼며 정원에서 꽃봉오리를 매달고 있는 꽃밭을 한 번 보고, 그 광경을 감상하고 있는 비비안을 한 번 보았다. 그는 침묵으로 이루어진 둘만의 시간도 좋아했으나, 연인의 목소리 또한 듣고 싶어 했다.

“비비안. 오늘은 그대가 알려줬던 홍차를 마셔보았소. 그대의 말대로 잠에서 깰 때 좋더군.”

비비안은 금방 또 화색이 되어 물었다.

“정말요? 입에는 맞았나요?”

“음. 강하게 쓴맛이 참 좋던데?”

“그렇군요. 다행이에요. 저의 동생들은 쓰다고 입에 대지 않더군요. 그럴 때마다 비교적 달달한 홍차를 주고는 한답니다.”

“남작님은? 그대의 부모님도 홍차를 좋아하시오?”

이렇게 케네스가 한 마디를 꺼내면 비비안은 그의 말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고는 했다. 그러면 케네스는 그 이야기를 잊지 않고 더 많은 걸 물어보았다. 얼핏 들으면 아무런 영양가가 없는 대화였으나, 두 사람은 그 대화에서 평온함과 열정을 동시에 느끼곤 했다. 이는 항상 있는 일이었으나, 오늘은 유독 비비안의 표정이 굳어있었다. 혹시 자신이 잘못한 것이 있는 건가 싶어 빠르게 생각을 정리한 그는 신중하게 말을 꺼냈다.

“비비안? 어디 불편하시오?”

“네?”

“아니, 그대의 표정이 오늘따라 안 좋아 보여서 말이오. 오는 길이 불편했소? 아니면 내가 무언가 기분을 상하게 했소?”

비비안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아니요! 오는 길도 편했고, 무엇보다 당신이 절 상처 입힌 적은 한 번도 없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안심할 수 있는 대답이기는 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본 적이 없을 정도 그림자가 진 얼굴을 케니스는 그저 넘어가기 어려웠다. 그가 걱정하는 표정으로 말없이 비비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몇 번인가 그의 눈빛을 피했지만, 결국에는 깊은숨을 내쉬었다.

“……케네스?”

“응? 왜 그러시오.”

“설마 자작님에게 아무런 말씀도 못 들은 건가요?”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골똘히 생각해 보았다. 최근 아버지와 무슨 대화를 했지? 이상한 점이 있던가? 아무리 떠올려보려 애써도 의심스러운 점이 없었기에, 그만 어깨를 으쓱였다. 비비안은 케네스를 보며 멋쩍게 웃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소?”

“……곧 알게 될 거랍니다.”

그렇게 말끝을 흐린 채 설명해 주지 않는 그를 보고 그는 더욱 이상함을 느꼈다. 자신의 아버지에게서는 아무런 느낌도 받지 못했으나, 적어도 집사장이 무언가 애써 숨기려는 느낌이 들기는 하였다. 그것과 관련이 있는 건가 싶어 머리를 굴려보아도, 상대방이 입을 닫아버렸기 때문에 케네스도 비비안을 따라 멋쩍게 웃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어색함에 그는 서둘러 서로가 즐거울 수 있을 화제를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미오가 새끼를 낳았다고 했었지? 지금은 어떻소? 새끼는 건강하오?”

비비안은 약간 눈을 깜빡이더니 고개를 살짝 들었다.

“아! 말씀을 안 드렸었군요?”

자신이 언제 사색에 빠져있었냐는 것처럼 다시 밝은 미소를 보여주며 열심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찰나일지언정 원래 모습대로 돌아와 준 그를 보며 케네스는 속으로 안심했다. 허나 그가 웃어준 것과는 별개의 문제로 그가 품고 있는 문제가 무엇인지 궁금해 견딜 수 없기도 하였다. 그나마 ‘곧 알게 될 거다,’라는 말을 위로 삼아 상대방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하늘이 어두워지고 햇살이 어느덧 주홍빛을 머금기 시작할 무렵, 드디어 기다리던 집사장이 정원에 나타나 두 사람이 인기척을 느낄 수 있도록 목을 가다듬었다. 당연한 결과로 두 사람은 집사장이 서 있는 정원의 나무판자 길을 보았다. 그의 얼굴은 주홍빛에 반사되어서인지 괜스레 서글퍼 보였다.

“도련님, 아가씨.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주인님께서 두 분을 부르십니다.”

케네스는 정자에서 일어나 비비안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직 벤치에서 일어나지 않은 그는 잠시 멀뚱히 손을 바라보았다. 이내 비비안은 손을 잡고 일어났지만, 그 잠깐의 시간 동안 케네스는 비비안이 머뭇거리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었다. 그럼에도 아무런 의문을 표하지 않고 속으로만 궁리했다. 어디로 갈지 알고 있으면서도 그의 안내를 따라 저택 안을 들어섰다.

그는 자신의 손을 잡고 걷고 있는 비비안을 스쳐보았다. 평소처럼 차분하게 걷고 있기는 했으나 얼굴에는 근심이 있어 보였다. 무언가 분위기를 풀 말이라도 해줘야 할까? 이런 일은 처음이라 그는 당혹스러움과 불안감에 마주치지도 않은 시선을 피했다. 그렇게 잡념에 사로잡혀 있으니 어느샌가 응접실의 문 앞에 도착한 뒤였다. 앞장서 걷고 있던 집사장은 고동색 응접실의 문에 두어 번 노크하였다. 그러자 안으로부터 들어오라는 말이 들렸다.

“오래 걸리게 해서 미안하구나.”

문이 닫히고 나서의 첫 마디였다. 어느 틈에 잡았던 손을 놓아버린 비비안이 싱긋 웃으면서 달트리 자작에게 인사하였다.

“오늘은 저택에 저를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전히 예의가 바르구나. 나야말로 와주어서 고맙다.”

말을 맺음과 동시에 자작은 벨벳 쿠션이 있는 소파로 손짓하였다. 두 사람은 소파에 앉아 달트리 자작과 바이스 남작을 마주 보았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은 방안을 감싸주었으나, 두 사내의 얼굴까지는 비추지 못했다. 그들의 윤곽만을 비추고 있는 햇빛에 두 사내는 어떤 위압감을 보여주기도 하였고, 동시에 어떤 진지함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케네스는 미묘한 긴장감에 마른침을 삼켰다.

“아버지. 저희를 굳이 여기에 불렀다는 건 아주 중요한 이야기가 있다는 뜻이 아닙니까?”

“……굳이 따지자면 너에게 해야 할 이야기가 있단다. 바이스 남작에게 듣기론, 비비안은 이미 알고 있는 모양이구나.”

그는 반사적으로 비비안을 바라보려 했으나, 그러지 않으려 참았다. 아까 비비안이 한 말이 생각났다. 곧 알게 될 거라는 말. 솔직히 이렇게까지 일찍 듣게 될 줄은 몰랐다. 허나 이런 생각은 전부 쓸모가 없었다. 어차피 언젠가는 듣게 되었을 거니까.

“말씀하십쇼.”

달트리 자작은 양손을 모은 채, 마치 기도라도 하는 자세로 생각에 잠겨있었다. 한참을 그러고 있었지만, 그 누구도 재촉하지 않았다. 재촉할 수 없었다. 응접실 안에는 기이할 정도로 무거운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 자작은 드디어 생각을 마쳤는지 의자에서 일어나 케네스와 비비안의 앞에 다가갔다. 그리고 한 쪽 무릎을 꿇어 둘의 얼굴을 정면에서 볼 수 있는 위치까지 내려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선을 마주치지 않은 상태였다.

“본론부터 말하마. 두 사람에게는 미안하지만, 너희 둘은 이만 갈라서야겠구나.”

케네스는 잠시 무슨 말을 들었는지 곰곰이 생각해야만 했다. 자신이 어떤 말을 들은 것인지 깨닫기 위해서 머리를 써야 했다. 그는 입을 뻥긋거리지조차 못하고 아버지의 얼굴을 보았다. 아버지의 얼굴이 어두워져 있던 이유는 역광 때문이 아니었다.

“케네스. 미안해요.”

이런 상황에서 말을 꺼낸 것은 뜻밖에도 비비안이었다. 케네스는 굳은 고개를 돌려 비비안을 살피었다. 무언가를 예감했던, 혹은 알고 있던 비비안도 마찬가지로 시선을 마주치지 못했다. 비비안의 입이 움직였다.

“저는 당신과 헤어져야만 해요.”


누군가가 물감이라도 풀어둔 것처럼 머릿속은 하얗게 물들어갔다. 그것은 곧 머리를 차갑다 못해 아프게도 만들었다. 그러나 케네스의 태도에는 그 통증이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대신에 부자연스러운 태도는 보여주었다. 그는 비비안의 표정을 보려 애썼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리야. 갑자기 헤어진다고? 대체 무엇 때문에?”

어리둥절한 마음에 그의 목소리가 차츰 커져갔다. 자칫 품위 없을 수도 있을 모습에 누군가는 말릴 수도 있었겠지만, 이 순간만큼은 그 누구도 그를 막아서지 않았다. 다들 비슷한 마음이었다. 다들 그를 공감했다. 그래서 얼굴조차도 마주 볼 수 없었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 침묵에 케네스는 속이 탔다.

“이유도 없이 갑자기 헤어지라는 겁니까? 그건 아닐 거 아니야.”

그는 누구에게 말한 걸까. 본인조차도 이 의문이 누구에게 향해있는지 몰랐다. 애초에 아무에게도 향해 있지 않았을 수도 있고, 반대로 모두에게 향해있는 걸 수도 있다. 누구든 상관없으니 대답이라도 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설명하마.”

아직도 무릎을 꿇고 있는 달트리 자작이 한쪽 손으로 케네스의 팔을 붙잡았다. 그는 쥐여진 팔에 힘이 들어갔지만 별다른 반항은 하지 않았다.

“한 3주가 지났나? 그리핀 자작의 저택에 방문했던 걸 기억하고 있지?”

케네스는 고개를 약하게 끄덕였다. 달트리 자작은 어색하게 웃고는 이야기를 마저 이었다.

“그에게 발독 백작님의 권유가 하나 있었다고 하더구나. 그리핀 자작의 도련님은 기억하고 있지? 그 아이와…… 그러니까, 비비안과 혼인하기를 원한다고 하셨지.”

“그게 무슨 소리인가요. 백작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다고요?”

황당한 말이었다. 그리핀 자작이 그런 말을 했었더라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백작님이 그런 말을 했다니, 안면도 거의 없는 케네스의 입장에서는 기가 차서 말이 안 나올 지경이었다. 현기증이 나는데, 앞에 앉아있던 바이스 남작이 말을 얹었다.

“남작이라는 귀족은 지위만으로 따졌을 때, 가장 평민에 가까운 귀족이라고 알려져 있죠. 그러나 실제로 그 권력 계열을 자세히 바라보면, 오히려 군주와 가까이 있는 신분이 바로 남작이기도 합니다. 현재 백작님의 가장 가까운 대리는 그리핀 자작이니 분명 군주에 가까운 이의 자식을 그리핀 가문의 자식과 결혼시키려는 심산이겠지요. 소백작님은 이미 혼인을 올렸으니까요. 즉, 이걸 보다 좋게 요약하자면…….”

“백작님은 사실상 더 권력 있는 남작의 자식을 수하에 둠으로 힘을 얻고자 한다, 혹은 남작님을 방해하고자 한다. 그런 말씀이십니까?”

남작은 눈을 둥글게 뜨고 몇 초간 케네스를 바라보다가 이내 긍정했다. 그러면서 입꼬리만 올려 거북해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사실 이렇게 직설적으로 말하는 건 예의에 어긋나죠. 무례를 용서하기를 바랍니다.”

“후, 이미 모두가 인지하고 있는 사실이 아닌가. 용서하고 말고의 문제조차 되지 않지.”

두 사람 사이에 약간의 농담이 오갔으나 케네스는 전혀 웃을 수가 없었다. 백작님이 말한 권유의 주인공은 그리핀 자작의 아들과 비비안이었으나, 그 옆에는 케네스도 아주 큰 영향을 받고 있었다. 자신들이 만남을 그만두어야만 두 사람이 혼인을 올릴 수가 있었다. 고집을 부려 만남을 지속할 수도 있을 테지만, 그렇다면 분명 비비안이 억울한 죄를 뒤집어쓸 것이 뻔했다. 케네스는 자신도 비비안도 억울하지 않을 선택지가 어디에 있나 깊게 고민한 끝에 한 가지 근본적인 사실에 눈치챘다.

이것은 일단 ‘권유’가 아니던가?

“아버지께는 죄송합니다만, 저는 거절하고 싶습니다. 애초에 고작 권유이지 않습니까? 우리에게도 거절할 권리 정도는 있지 않겠습니까.”

깨나 좋으면서도 당연한 선택지였다. 허나 그 말을 하면서도 케네스는 자신이 어딘가 중요한 부분을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제가 받아들였어요, 케네스.”

그의 쏠쏠하고 평범한 결론은 가장 충격적인 방법으로 깨지고 말았다. 비비안은 어째서인지 사뭇 당당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순간 그의 은빛 눈동자에 자신의 얼빠진 얼굴이 비친다는 생각이 들어 시선을 돌려버리고 싶었다.

“받아들였다니? 그대가?”

“네. 제가 받아들였어요.”

잠시 호흡을 크게 고른 비비안이 충격에 휩싸여있는 그에게 잔혹할 정도로 친절하게 이유를 알려주었다.

“케네스도 알다시피 제 동생들은 친동생이 아니에요. 순식간에 부모를 잃어 저의 부모님에게 입양된 아이들이죠. 제 동생들이 어째서 부모를 잃었는지 잘 아시죠?”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사실은 비비안이 동생들의 이야기를 꺼낼 때부터 예상하고 있었다.

그의 동생들은 원래 훌륭한 남작가의 자식들이었다. 그 남작 부부는 도를 넘는 대담함을 원인으로 제거당했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그 누구도 입 밖으로 말하지는 않았으나, 세간의 사람들은 당연히 백작이 범인이라는 공통적인 추리를 하고 있었다. 이미 그의 태도와 성격이 충분한 증거품이 되어주었다. 그런 남작 부부의 자식을 입양한 바이스 남작은 자연스럽게 발독 백작에게 좋지 못한 인상을 남겼을 것이다. 심지어 바이스 가문조차 훌륭한 인품을 가졌다며 평민들에게 명성이 자자하지 않은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고 나서야 왜 비비안이 이런 선택을 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제가 여기서 거절을 하게 된다면……. 알고 있죠?”

이해는 할 수 있었다. 그래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이 이야기를 받아들인다면, 지금까지 그와 만나서 얻었던 행복한 기억들이 전부 후회와 원망으로 뒤바뀔 것 같았다. 무언가 비비안의 결정을 막을 반론이 필요했다. 쉬지 않고 머리를 굴려보았으나 시간은 그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케네스. 정말 미안하지만, 받아들여줬으면 좋겠어요. 그릇된 선택은 저뿐만이 아니라 당신마저 위협하고 말 거예요. 만약 제 욕심 때문에 당신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저는 그 누구도 용서할 수 없을 거예요.”

그의 말에 감정이 앞서나갔다. 그저 용서하지 말라고, 혼자 떠나버리지 말라며 호소하고 싶었다. 그러나 입을 꾹 닫고 그의 시선을 피해버렸다. 지금 이런 상황에서 감정으로 대화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았다.

케네스가 입을 열 생각이 없어 보이자, 달트리 자작은 붙잡고 있던 그의 팔에서 손을 놓고 그만 일어났다. 자작은 자신의 아들을 부드럽게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나는 네게 선택권을 주고 싶다. 이건 비비안의 문제이기는 하지만, 너의 의견도 반드시 들어있어야 한단다.”

자작은 가끔씩 삐덕거리는 소리를 내는 나무 바닥 위를 걸어가 문에 손을 짚었다.

“내가 전해야 하는 말은 이게 전부다. 네게 결심이 섰다면, 그때 다시 나에게 와 이야기를 들려다오.”

자작은 문을 열며 집사를 불렀다. 케네스는 여전히 어지러웠다. 분하지만 어떤 사건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전부 받아들였다. 크게 반박하고 싶었으나 마땅히 할 수 있는 말이 없는 자신에게 실망스럽기도 했다. 이마를 쓸며 고개를 들자 이미 창밖의 하늘에는 해가 사라지고 없었다. 남색 어둠은 그를 더 심란하게 만들었다.

바이스 부녀는 의자에서 일어나 조용히 응접실 밖으로 향했다. 남작은 자신의 딸을 먼저 내보내고 말없이 앉아있는 케네스의 어깨에 살포시 손을 얹었다. 시선을 돌려 남작의 주름진 손을 바라보았으나, 이상하게도 그의 얼굴까지 볼 기운은 남아있지 않았다.

“이틀 정도는 자작님의 넓은 아량으로 이곳에 머무를 겁니다. 딸아이는 언제나 묵는 방에서 날을 보낼 예정이니, 이야기가 하고 싶다면 가보세요.”

하고 싶은 말을 전한 바이스 남작은 그만 그의 어깨에서 손을 놓았다. 저벅저벅 몇 걸음을 걸어 열려있는 문밖으로 나가려 했다. 그런 남작을 케네스가 불러 세웠다. 그의 시선은 남색 하늘에 머물러 있었다.

“남작님은 이대로도 괜찮은 건가요?”

잠시 말이 없던 남작은 케네스를 바라보지 않은 채 말했다. 그 때문에 목소리는 작게 들렸다.

“저야 늘 딸아이의 편이니까요.”

그 말을 끝으로 무거운 문이 소리를 내어 닫혔다. 케네스는 아직도 팔짱을 낀 채 방에 남아있었다. 점점 침체되는 마음에 따라 그의 몸도 같이 쓰러져, 이만 소파에 누웠다. 케네스는 손으로 눈을 덮어 빛이 들어오지 않게 했다.

달트리 저택에 사는 이들이 저녁 식사를 마쳤을 때였다. 메이드가 몇 번이고 케네스의 방에 찾아와 저녁 식사를 권유했으나 그는 메이드가 오는 족족 거절했다. 누군가와 같이 있고 싶지 않은 기분이었지만, 당연하게도 메이드는 알 턱이 없었다. 이번에도 메이드는 포기하지 않고 케네스의 방문을 노크했다. 똑똑하고 문을 두드려보아도 안에서는 대답이 들리지 않았다.

“케네스 도련님. 역시 저녁 식사는 하셔야지요.”

대답은 없었다. 메이드는 문 앞을 서성이며 손끝을 물었다. 케네스가 어렸을 때에도 이런 일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감도 오지 않았다. 난감한 나머지 메이드는 한참을 문 앞에 서있다가, 용기를 내어 다시 한번 노크했다.

“도련님? 안에 계시나요? 대답이라도 해주세요.”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그는 더 빨라진 걸음으로 문 앞을 걷기 시작했다. 지금 당장이라도 문을 열어 안으로 들어가야 할까? 그는 더욱 큰 각오를 다졌다. 문고리에 손을 얹은 그때, 갑자기 문이 벌컥 열렸다.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던 메이드는 얼빠진 표정을 지으며 뒤로 물러났다. 케네스가 한 쪽 눈을 찡그리며 다가왔다. 그가 한 쪽 눈을 찡그린다는 것은 어딘가 마음에 안 드는 일이 있다는 거였다. 메이드는 긴장감에 온몸이 굳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케네스는 화를 표현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오늘은 그럴 기분이 아니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래도요……. 작은 도련님께서도 걱정하고 계시고, 무엇보다 건강에 안 좋아요.”

잔뜩 소심해진 모습으로 말을 잇는 메이드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케네스는 숨이 턱 막혔다. 그는 문을 붙잡고 있던 손을 거두고 자신의 목을 괜히 매만졌다.

“한 끼 안 먹는다고 갑자기 병이 생기거나 그렇지는 않죠. 오늘은 이대로 쉬고 싶습니다.”

아까는 그대로 문을 닫아버렸다만, 지금은 잠시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메이드는 그를 보며 머뭇거리다가 이내 고개를 꾸벅 숙이고 살금살금 어색한 공기를 빠져나오려 노력했다. 자작 부인님께 어떻게 설명할까 고민하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케네스가 불러 세웠다. 놀란 나머지 몸이 튀어 올랐지만 그다지 티가 나지는 않았다.

“네! 무슨 일이세요?”

“손님분들은 식사를 마쳤습니까?”

“네, 꽤 전에 마치셨습니다.”

메이드 이유를 무심코 물었으나 케네스는 생각에 빠진 듯 도통 입을 열지 않았다. 다시 가던 길을 가야 하나 망설이고 있으니 케네스가 그대로 방을 나서 문을 닫아버렸다.

“혹여 제가 어디로 갔는지 누군가가 물어본다면, 손님이 계신 방으로 갔다고 말씀해 주십시오.”

그가 손님의 방에 들락날락하는 일은 자주 있었기 때문에, 메이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케네스는 넓은 복도를 걸어 계단 앞까지 갔다. 옆에 지나가는 사람들이 있었으나 크게 신경 쓰지 않고 계단을 올라 3층으로 갔다. 조금 전에 바이스 남작이 말해줬던 ‘딸아이가 언제나 묵는 방’은 3층에 있는 케네스 방 바로 위에 있는 방이었다. 그는 익숙한 걸음걸이로 그 방의 문 앞까지 섰다. 겉으로 보았을 때는 자연스러웠을지도 몰라도 케네스는 이 행동이 오늘따라 유독 불편하게 느껴졌다.

그가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는 금방 대답이 들렸다. 자신이 누구인지 말하자 들어와도 된다는 말도 들려왔다. 그는 시끄럽지 않도록 천천히 문을 열었다.

“올 줄 알았어요, 케네스.”

비비안은 편한 드레스로 갈아입은 채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정돈하고 있었다. 눈을 마주치며 웃는 비비안에게로 다가가 그의 붉은 머리카락을 살짝 쥐었다. 약간 젖어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씻고 왔소?”

케네스는 옷걸이에 걸려 있는 타을 한 장 꺼내어 비비안의 머리카락을 쓸었다. 비비안은 피하지 않고 얌전히 손길을 받아들였다. 타월은 어느새 물기를 빨아들여 축축해졌지만, 반대로 머리카락은 흐름을 타고 부드럽게 흩날리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됐다 생각하여 타을 다시 옷걸이에 걸어두었다. 케네스의 뒷모습을 보며 의자에 앉아있던 비비안이 키득거리며 웃었다.

“왜 그러시오?”

“그냥, 능숙하다 싶어서요.”

“훗.”

그러면서 케네스는 자신의 길고 하얀 머리카락을 목에서부터 시작하여 바깥으로 흘려보냈다. 그의 머리카락은 나풀거리며 다시금 제자리를 찾아갔다. 비비안은 눈을 빛내며 그의 머리카락을 한참 동안이나 바라보았다. 그러다 결국 시선을 거두며 의자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케네스도 그에게 다가가 창가 앞에 섰다.

어둑해진 하늘에는 다양한 색으로 반짝거리는 점과 하나의 거대한 원이 걸려있었다. 비비안은 창가에 턱을 괴고 그 하늘을 한없이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에는 비슷한 색으로 빛나는 달이 하나씩 박혀있었다. 이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낸다면, 분명 제목은 ‘고향을 바라보며’가 될 거라며 케네스는 감상에 젖었다.

“이곳에 처음 왔을 때 말인데요.”

벌써 8년도 지난 이야기였다. 아득히 먼 옛날이야기였으나 그는 잘 기억이 났다. 그 화려한 첫 만남을 어찌 잊겠는가? 그가 그 사이 회상 속 세계로 여행을 떠나자 비비안은 그를 어서 현실로 데려와놓았다.

“처음에는 이곳이 얼마나 낯설었는지 모릅니다. 저는 남들보다도 외출하는 일이 드물었으니까요. 케네스가 저의 첫 친구라도 해도 과언이 아니었죠.”

“그건 나도 마찬가지라오. 주변에 있는 사람들과는 도통 친해지기 어려웠지만, 그대와는 이상하리만큼 대화가 잘 통해서 즐거웠지.”

“그랬나요? 제가 봤을 때는 항상 즐거워 보이던걸요.”

“사무적인 관계랑 그대는 다르지 않소.”

그는 오른손을 들어 그대로 비비안에 어깨를 감쌌다. 그러자 그는 마치 손에 이끌리기라도 한 듯 조심스레 케네스의 어깨에 기대었다. 얇은 옷감 너머로 서로의 체온이 잘 느껴졌다. 두 사람은 눈을 감고 한참 서로에게 기대어 차가운 공기와, 그런 와중에도 따뜻한 서로의 체온을 느끼고 있었다.

만족스럽지는 않았으나, 정도를 알고 그의 어깨를 놓은 케네스는 바로 뒤에 놓여있는 침대에 앉았다. 침대는 삐그덕소리를 내며 흔들렸고 이불은 그새 주름을 만들며 구겨졌다. 비비안은 아직도 창가에 서있었지만, 이미 시선은 하늘에서 벗어난지 오래였다. 바깥을 등진 그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실려 흔들렸다. 바깥의 약한 빛은 비비안의 후광이 되었다.

“옆에 앉아도 될까요?”

“당연한 것을 물어보는군.”

비비안은 다시 키득거렸다. 저런 말들은 하나같이 케네스에게 치는 장난이었다. 하지만 케네스는 못 알아채는 것이 대부분이었으니, 이는 비비안만의 유희나 다름없었다. 그는 창문을 닫고 사뿐히 걸어와 케네스의 옆에 앉았다. 침대는 다시 한번 삐그덕하며 소리를 내었으나, 금방 조용해졌다. 방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은 그 어떤 소리조차 만들지 않았다. 들리는 거라곤 두 사람의 한숨 섞인 호흡소리뿐이었다.

평소에도 케네스는 비비안이 저택에 묵는 날이면 곧잘 방에 찾아오곤 했다. 그러면 두 사람은 밤새 서로의 곁을 지키다가, 저도 모르는 사이에 잠에 빠지기 마련이었다. 얼핏 보면 이번도 지난 나날과는 다름없는 흐름이었지만, 이번에는 케네스에게 확실한 이유가 있다는 것을 내심 깨닫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 누구도 화제를 꺼내지 않고 자꾸 장난스러운 분위기만 만들었다. 이런 두 사람의 성격은 부모로부터 이어받은 것이었다.

침대에 앉아있는 두 사람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케네스는 대체 언제쯤 이야기를 꺼내야 할까 같은 고민 대신 상대방의 얼굴색만 살폈다. 비비안은 무엇이 즐거운지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그러나 그 웃음은 눈부실 정도로 환한 미소를 머금고 있지는 않았다. 케네스가 불쑥 웃었다.

“갑자기 왜 웃나요?”

“알면서 묻는 거요?”

말에는 웃음기가 돌고 있었지만 매우 진지한 말이었다. 그는 몸을 돌려 비비안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비비안도 몸을 돌려 케네스를 마주 보았다. 이상하게도 케네스의 얼굴에는 활기찰 정도의 생기가 있었다. 딱히 좋은 징조는 아니었다.

“차라리 저 멀리 다른 곳으로 가지는 않겠소? 흠. 아버지께서 예전에 울창한 숲을 발견한 적이 있다고 하셨소. 근데 그 안이 마치 동굴처럼 어두워서 감히 다가갈 수가 없다고 하더군. 그뿐이 아니야. 주위는 바위가 박혀 있는 절벽이 있다고 했소. 음? 절벽이라고 해야 할까? 그리 높지는 않다고 하셨으니, 절벽은 아닐지도 모르겠군. 그렇다면 바위 계단일지도 모르겠소.”

“음, 케네스?”

“아버지가 그곳에 가본 적이 없다고 하셨으니, 모험이라 생각하고 가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는 생각하오. 어떻소?”

“모험은 멋지다고 생각해요. 마침 저도 아버지께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으니 궁금하기는 하지만…….”

비비안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뒤이어 나올 말을 듣지도 않았지만 케네스의 기분은 이미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자신의 이런 태도가 꼴사납게 느껴져 얼굴이 화끈거릴 것만 같았다.

“미안해요 케네스. 당신에게 있어서 통보와 다름없는 이야기라는 거 알아요. 하지만, 아까도 말했지만…….”

“알고 있소.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 정도는 다 알고 있지. 하지만 그러기가 참 힘들군.”

잠시 가만히 이불에 움푹 들어간 부분을 보며 생각에 잠긴 케네스는 불현듯 그대로 침대에 누워버렸다. 비비안은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그를 따라 침대에 풀썩하고 누웠다. 두 사람의 눈은 서로만을 담고 있었다.

“그리핀 자작의 도련님을 알고 있소?”

숨을 크게 내쉰 케네스가 묻자, 비비안은 눈을 양옆으로 굴리고 나서야 대답하였다.

“제가 어렸을 적 만나 뵌 적은 있답니다. 이름은 잘 기억하지 못하지만요.”

“앤드류라고 하오. 나도 예전에는 자주 그리핀 자작의 저택에 놀러 갔었소. 최근에는 간 적이 없으니 지금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감조차 오지 않는군. 옛날엔 조금 더 귀여운 동생 같은 느낌이었는데.”

“동생이라면, 당신보다 어린가요?”

“아니, 나이는 같지. 그런데 성격이 워낙 온순하다고 해야 하나? 손해 보면서 사는 성격이라 스파이크조차 형 노릇을 했지. 스파이크가 형이라니, 놀랍지도 않아.”

비비안은 머릿속으로 자신이 보았던 스파이크를 떠올렸다. 개구지고 쾌활한 성격이 눈에 띄어 처음 보았을 때도 누군가의 동생이라는 생각이 들었었다. 그런 스파이크가 누군가를 보살피려 한 적이 있다니, 그의 표정은 저절로 케네스와 같은 얼굴이 되었다.

“그래도 잘하는 건 많았소. 남을 배려하다 보니 손해도 보는 거겠지. 그래서인지 나쁜 사람들도 꼬였지만, 그만큼 앤드류를 도와주려는 사람들도 모여들었소. 그럼 그는 쑥스러워하면서도 기뻐하는 것이 전부 티가 났지.”

“그렇다는 건 좋은 사람이라는 소리로군요. 선한 사람의 근처에는 선한 사람이 모인다고도 하잖아요?”

“하하. 맞는 말이야. 앤드류는 좋은 친구였지. 못 본 지 오래되어 그리웠던 참이었소.”

그리웠다는 말에는 묘한 힘이 있었다. 진짜로 그리워하는 말투였으나 어딘가 엇나간 느낌도 있었다. 비비안은 딱히 대답을 하지는 않았다. 하고 싶어도 무어라 말해야 할지 몰랐다. 어찌 보면 엇나가게 만든 것은 자신이었기 때문이었다. 비비안은 조심스럽게 케네스의 가슴께에 손을 얹었다. 그의 심장 박동이 손을 타고 올라왔다.

“그 숲에 가보고 싶어요.”

불쑥 나온 말이었다. 비비안도 자신이 입 밖으로 꺼내 줄 몰랐었기에 당황했다. 케네스는 잠시 반응이 없었으나 정적이 그렇게 오래 가지는 않았다.

“가겠소?”

“…….”

“그래. 알고 있었소.”

그는 자세를 약간 고쳐 비비안의 허리 위로 손을 올렸다. 어떻게 보자면 안는 듯한 자세였다. 그는 멍하게 이상한 곳을 바라보았다.

“남은 시간은 어느 정도지?”

“이번이 마지막일 거예요.”

“뭐?”

이제야 케네스는 연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진심인지를 확인하고 싶어서 나오는 하나의 버릇이었다. 농담이기를 바라는 그의 기대와는 다르게 비비안의 표정에 손이 떨렸다. 오늘이 그와 만나는 마지막 날이라는 가정은 해보지도 못했다. 비비안은 처음부터 이를 알고 있었을까?

“혼인을 하게 된다면 식이 언제 치질지 아버지께 여쭈어보았답니다.”

“언제요?”

“한 달쯤 지나서요.”

“……한 달?”

한 달. 약 30일이라는 시간이 지나면 자신의 연인은 다른 사람의 배우자가 된다. 그 사실을 떠올리자 울화통을 터뜨리고 싶은 마음에 마른 세수를 했다. 화가 나면서도, 어째서 이번이 마지막 만남이 될지는 알 것 같았다. 분명 다음 주에는 자식들을 서로 소개하는 자리가 있을 것이다. 차라리 그런 자리라도 있어서 다행인 것일 수도 있다. 그렇지 않았다면 진작 2주 내로 식이 치러져, 케네스는 비비안이 결혼했다는 소식을 듣게 됐을 거다. 물론 이런 사실은 케네스에게 전혀 중요한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는 상체를 일으켜, 누워서 자신을 바라보는 비비안을 내려보았다. 웃기게도 그의 얼굴에도 불만하는 기색이 엿보였다. 당연하다. 듣는 이도 이렇게 열받는데 본인은 이 원치 않는 혼인이 얼마나 어이가 없을까? 앤드류도 이 혼인을 원했을까? 안면도 없는 자식 두 명을 무작정 결혼시키는 것이 옳은 것인가? 케네스의 머리는 점차 복잡해져갔다.

비비안도 몸을 일으켜 그의 손을 잡았다. 아무 말도 오가지 않았으나 기분이 확실하게 전달되었다. 자신의 손을 꽉 잡은 비비안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그가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그래도 혼인까지는 앞으로 한 달이나 남지 않았소. 아니지, 혼인한 후로도 만날 수는 있는 것 아닌가? 왜 이번이 마지막이라 생각하는 것이오.”

비비안은 눈을 지그 감았다.

“제가 듣기로는 일주일 후에 혼담을 위해 그리핀 자작님의 저택에 방문한다고 해요. 그 혼담을 뒤로 분명 바빠질 테고요. 만약 식이 끝난 다음에는 평화로워진다고 해도…….”

그는 고개를 숙인 상태로 시선만 살짝 올려 케네스를 올려다보았다.

“우리 같은 사이가 만난다면, 분명 세간에 좋은 않은 이야기가 퍼지겠죠. 혹시라도 백작님이 이 사실을 알고 있다면 아예 만날 수 없게 조치를 취할지도 모릅니다.”

분명 일리가 있는 말이었고, 가정했던 부분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성적으로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비비안에게만큼은 희망적인 이야기를 듣고 싶었지만, 비비안은 매우 현실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이었다.

오늘은 순식간에 너무나도 많은 청천벽력과도 같은 통보를 들었다. 자신의 연인이 하루아침에 다른 사람과 결혼하게 된다. 심지어 그 연인을 만날 수 있는 것은 이번이 마지막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지?

그가 지금 이성을 잃어서이기 때문일까.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온 한 가지 결론이 케네스의 머리를 지배하는 듯했다. 잠시 가만히 생각에 잠겨있던 케네스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무언가의 홀린 것처럼 중얼거리며 방문 앞으로 갔다. 그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걸 인지한 비비안은 사뭇 불길한 기분이 들어 그에게로 손을 뻗었다.

“케네스!”

“응?.”

“그, 어딜 가시나요?”

그의 시선은 이상한 곳에 떨어져 있었다. 자꾸만 느껴지는 불길한 느낌에 비비안의 얼굴을 굳어졌다. 그러나 케네스는 갑자기 활짝 웃으며 걱정하지 말라는 듯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생각보다 밤이 깊어지지 않았소?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은지라 좀 피곤해져서 말이오. 그대도 이곳까지 오느라 여간 피곤한 게 아닐 텐데, 어서 주무시오. 미안하지만 이 이야기는 내일 이어서 합시다. 괜찮겠소?”

아직도 수상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으나 너무나도 상냥한 말투에 비비안은 그저 손을 거두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걸 보고 케네스는 빙긋 웃으며 ‘좋은 꿈 꾸길,’이라 말했다. 비비안도 방을 나서는 이에게 똑같은 대답을 하고 방문이 닫히는 걸 그저 바라보았다. 당혹스러움에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말이다.

케네스는 충동적으로 비비안의 방을 나와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충분히 늦은 시간이어도 사람들은 많이 지나다니고 있었다. 주변에서 지나가는 케네스에게 안부를 물었지만, 그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무언가 중얼거리며 계단을 내려가고, 금 자신의 방의 문고리를 잡은 그는 방에 들어서자마자 자신이 이미 어떤 각오를 다졌는지를 깨달았다.

그는 침대에 드러누웠다. 여전히 비비안에 대한 복잡한 생각은 들었지만, 방을 나설 때와는 다른 생각들이 머릿속을 꽉 채우고 있었다. 오늘 밤은 분명 잠이 오지 않을 것이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든 케네스는 몸을 옆으로 돌려 커튼 사이로 보이는 바깥 풍경을 보았다. 검은 하늘에는 수많은 별과 은빛 보름달이 은밀하게 모습을 비추었다.


어느새 잠들었던 케네스는 본능적으로 눈을 떴다. 지금이 몇 시인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여러 가지 잡음에 귀를 기울였다. 창문 틈으로 들리는 바람 소리, 새가 지저귀는 소리, 도망가는 새를 잡느라 뛰어다니는 네 발 짐승의 소리.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소리에 침대에서 일어나 커튼을 열었다. 하늘이 어두운 보랏빛과 샛노란 색을 뒤섞은 팔레트처럼 보였다. 아직은 새벽이라는 뜻이었다.

그는 속으로 애가 탔다. 혹시 지금 같은 이른 시간에 다른 누군가가 깨어있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특히 스파이크가 문제였다. 나름 이른 아침 복도에서 마주쳤던 동생이었기에 나가지도 못하고 방 안에서 손톱을 깨물며 이리저리 돌아다니기나 하였다.

그때였다. 터벅터벅, 복도에서 누군가가 걷는 소리가 들렸다. 바짝 긴장하게 된 케네스는 살금살금 방문에 귀를 붙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여러 명은 아니었던 것 같다. 대화소리도 없이 느릿느릿 한 발걸음이 케네스의 방을 향해 다가왔다.

밖에 있는 사람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던 케네스의 머릿속에는 번개처럼 어떤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는 바로 문을 열었다. 물론 요란하지 않도록 천천히 열어 문틈 사이로 얼굴의 반만 비추었다. 마침 문 근처에 있던 발소리의 주인이 깜짝 놀라 말하였다.

“아니, 도련님!?”

크게 소리치는 그에 케네스는 황급히 검지를 올려 입에 붙이고는 쉿 소리를 내었다. 저택 안에 있는 사람 중, 저택의 규칙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눈앞에 있는 이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는 황급히 자신의 입을 틀어막고 거의 숨도 쉬는 것을 잊고 멀뚱히 케네스를 바라보았다. 그동안 케네스는 자신의 앞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떠올려보았다. 저택에 들어온 지 두 달 채 지나지 않은 신입 고용인, 로비였다.

그는 피식 웃으며 살짝 손짓했다. 로비는 케네스의 눈앞에 있는 사람은 자신밖에 없었음에도 자신을 가리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의 바보 같은 반응은 케네스가 정색하며 눈빛으로 따지고 나서야 사라졌다. 로비는 주변에 있는 귀신의 눈치라도 보는지 흘끗거리며 케네스의 방안으로 들어왔다. 로비가 처음 보는 방 안을 구경하며 말했다.

“도련님, 벌써 일어나신 건가요? 지금 새벽 5시입니다.”

“흠, 아직 5시밖에 안됐소? 생각보다도 눈이 빨리 떠진 게 맞았군.”

“그럼요. 뭔가 하실 일이라도 있으신 건지요?”

케네스는 그의 말에 눈을 끔뻑이다가 또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그의 웃음에 로비는 아무것도 모른 채 눈을 깜빡였다.

“그래. 일이 생겨서 말이오. 그런데 나 혼자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니, 그대가 좀 도와줬으면 하는데.”

로비의 눈이 반짝 빛났다. 지금껏 이 저택에 들어와 도움이 된 적이 없다고 생각하여 의기소침해져 있던 찰나였다. 이렇게, 심지어 큰 도련님의 도움이 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니! 여기서 업적을 쌓으면 분명 좋은 인상을 얻어 포상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 그는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말씀만 주십시오! 제가 할 수 있는 거라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무엇이든?”

“네! 무엇이든요.”

신입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는 것이 거슬려 그는 문 근처에만 서성이지 말고 가까이 오라고 불렀다. 그는 신난 나머지 빠르게 다가가, 케네스의 말을 하나도 빠짐없이 듣겠다는 의지를 담으며 귀를 가져갔다. 약간의 코웃음을 친 케네스는 그의 바람대로 또박또박 말해주었다.

“지금 당장 저택에 있는 사람들 몰래 마차를 준비해 주시오. 행선지는 발독 백작님의 저택이니 그리 아시고. 알겠지?”

눈을 곱게 접으며 싱글벙글 웃고 있던 로비의 얼굴은, 케네스가 한 단어를 내뱉을 때마다 파랗게 질려갔다. 아니, 이 넓은 저택에서 몰래 빠져나가겠다는 말인가? 이 이른 시간에? 심지어 가는 곳은 또 백작님의 저택이라고? 어떻게 보면 처음 맡게 될 임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그 첫 임무가 이렇게나 난이도가 있어도 되는 건가. 로비는 열심히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안됩니다! 그, 그래요. 이 이른 시간에 마차가 지나갈 리 만무합니다. 몰래 빠져나간다고 해봤자 마차를 찾지 못해서 결국 가지 못할 것이 뻔합니다!”

“그렇다면 제이미를 부르시게. 비록 은퇴하기는 했어도 한때 마부이지 않았소. 심지어 우리 저택에는 마차까지 준비되어 있지. 오래되긴 했지만.”

케네스가 약간 자조적으로 내뱉었다. 어떤 계획이지는 눈치껏 깨달았지만, 그럼에도 신입은 겁에 질려 뒷걸음질 치기 바빴다. 이제는 목소리까지 벌벌 떨었다.

“무모하지 않습니까? 제이미 씨를 부른다고 해도 그가 이 부탁을 들어주실지도 잘 모르겠고, 오히려 그를 부르는 길에 들킬 수도 있는 거 아닙니까? 그리고 마차가 출발하는데 누가 모르겠습니까. 분명 실행하기도 전에 들키고 말 겁니다!”

눈썹을 삐뚤하게 올린 케네스는 그가 이야기를 마치기까지 기다렸다. 그의 기나긴 항변의 슬슬 마무리되어가자, 그는 그의 뒷말을 자르고 대뜸 서랍을 열어, 내용이 없는 편지지를 두 장 집어 들었다.

“자네가 일어나 내 방까지 오면서 만난 이가 있소?”

“도련님이 계시지요.”

“나 말고. 난 심지어 먼저 일어나 있지 않았나.”

그리고 손에 들고 있던 편지지 한 장을 로비의 손에 쥐여주면서 말했다.

“알겠소? 지금 이 시간이면 다들 자고 있을 시간이란 말이오. 그러니 실패할 생각하지 말고 가시오. 만일 누군가와 마주치고는 무슨 일이냐고 하면, 그 편지지를 보여주기만 하면서 나의 심부름을 하고 있다고 말하시오. 그럼 알아서들 피해 가겠지.”

케네스는 그의 어깨에 손을 턱 올리고 매우 진지한 얼굴로 로비를 바라보았다. 덕분에 그는 변명할 틈조차 찾지 못하고 바들바들 떨기만 했다.

“일이 안 풀리면 내가 알아서 처리하겠소. 그러니 다시 한번 말하지. 실패할 생각하지 말고 다녀오시오.”

케네스는 로비를 앞장 세워 어느덧 저택의 대문까지 나갔다. 저택을 나서면서 만난 이가 아무도 없으니 아무래도 그의 첫 임무는 완벽하게 마친 모양이었다. 케네스가 팔에 걸치고 있던 검은 외투를 입으며 입꼬리를 올렸다.

“이렇게 잘할 거면서 뭘 그리도 걱정한 것이오?”

“저도 될 줄은 몰랐답니다, 도련님. 그래도 역시 무모했다고 생각합니다만…….”

케네스는 그의 말을 듣기는 하였으나 다른 쪽 귀로 흘려보냈다. 그러면서 저 멀리에서부터 천천히 다가오고 있는 두 마리의 말과 오래된 마차, 그리고 그를 끌고 오는 나이 든 남자에게 손을 들며 인사했다. 나이 든 남자, 제이미는 케네스에게 다가가 한숨을 쉬며 인사했다.

“아이고, 도련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 노쇠한 마부를 이렇게 이용하시면 곤란합니다. 심지어 저 젊은이까지 데려오시고. 주인어른께 들키면 어쩌시려고요.”

“음, 그건 사과하죠. 미안합니다.”

“에이구. 항상 사과는 잘 하셔서 더 문제입니다.”

제이미는 조용히 마차에서 모자를 꺼내어 먼지를 털어내고 머리 위에 썼다. 이제는 진짜 마부 제이미로서 대할 수 있었다.

“이 자에게 들었을 거라고는 생각합니다만, 발독 백작님의 저택으로 가고 싶습니다.”

“예, 들었고 말고요. 어서 타십시오. 이러다가 누가 눈치채기라도 하면 큰일이지 않습니까.”

발걸음을 멈춘 케네스는 마차 문을 열고 있는 로비와 마차 위로 올라가고 있는 마부를 번갈아 보고, 이내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오늘 일은 제가 다 책임질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이미는 그 말을 듣고 그저 웃기만 하였다. 로비는 뻘쭘하게 웃으면서 그가 타기를 기다렸다. 케네스 역시 미소 지으며 마차에 타는데, 로비도 불쑥 마차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마차는 아주 느린 속도로 출발하였다. 발굽 소리가 들리면 누군가가 일어날 수도 있을 거라 생각한 제이미의 대처였다. 케네스는 커튼을 걷으며 밖을 구경하는 로비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을 느낀 로비는 이내 케네스와 마주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따라올 줄은 몰랐는데?”

“예?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책임을 져주신다고 하셨으니, 지금 당장은 도련님이 제 주인이나 마찬가지지요.”

“……제이미가 있지 않나.”

“저 또한 반강제적이기는 하나 이 일에 협조했으니, 도련님을 따라가야죠! 이미 강을 건넜지 않았습니까!”

그의 똘망똘망한 모습에 케네스는 아무말 없이 팔짱을 끼고 등받이에 기댔다. 바깥은 이제 보라색보다도 파란색에 가까운 빛을 띄우고 있었다. 불현듯 지금 저택에서 자고 있을 가족과 바이스 부녀를 떠올렸다. 일어나서 내가 없어진 걸 알면 난리가 날 텐데. 만일을 위해 편지를 써서 책상 위에 두기를 잘했다는 생각은 들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지금 이런 행동이 굉장히 대책 없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쩌겠나? 강은 이미 건너고 말았는데. 이제는 미래의 자신이 알아서 해결해야 할 일이었다.

“그런데 도련님.”

한창 사색에 빠져있는데 옆에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돌아보았다. 로비는 사뭇 쭈뼛거리며 케네스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왜?”

“실례가 아니라면 여쭈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만…….”

그는 어서 말하라고 손바닥을 보였다. 로비는 곧 얼굴을 약간 붉히며 말했다.

“혹시 무력을 쓸 일은 없겠죠?”

“……응?”

전혀 고려해 보지도 못한 질문에 말문이 막혔다. 그러자 그는 횡설수설 말을 하기 시작했다.

“아니, 혹시 모르지 않습니까? 외람된 말일지도 모릅니다만, 지금 도련님께선 근심이 가득한 얼굴이신데. 도련님이 그런 표정을 지으실 정도면 혹시 폭력……을 사용하게 될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헛, 그럼 저는 처형당하게 될지도 모르는 겁니까?”

말도 안 될 정도로 비약된 생각에 케네스는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큭큭 하고 웃고 있으니 옆에서는 더욱 어쩔 줄 몰라 하며 설명하려 들었지만, 이내 케네스가 손을 뻗어 그가 말할 수 없게 하였다.

태양이 높게 떠올라 모든 대지를 비추는 시간이 되었을 때쯤, 케네스는 곧 발독 백작의 저택에 도착할 거라는 걸 주변 건축물을 보고 알 수 있었다. 달트리나 바이스 가문의 저택과는 다르게 발독 가문의 대저택은 도심에 있었다. 덕분에 다른 마을 사람이 이 마을에 들어오려면 상당한 관문을 넘어서야만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다른 귀족들은 이름만 대면 평민보다는 빠르게 길을 열어준다는 것이다. 생각보다 시간을 잡아먹기는 했으나 문지기 두 명도 이내 달트리의 이름을 듣고선 고개를 끄덕이며 마차를 들여보내주었다.

마을에는 사람들이 지나가며 그들의 오래된 마차를 신기하게 쳐다보았다. 가끔씩은 마차 안에서 밖을 바라보던 케네스와 눈이 마주친 이들도 있었다. 그러면 그들은 놀란 눈치로 서둘러 상가 쪽으로 눈을 돌렸다. 저라도 다른 사람과 눈이 마주치면 머쓱해서 그만 눈을 돌릴 거라고 생각한 케네스는 이만 낡은 커튼으로 창문을 닫아 자신과 밖이 차단되게 하였다. 햇빛은 오로지 위에 있는 작은 창문으로만 들어와서 적당히 밝은 실내가 되었다.

마차가 조금씩 속도를 늦추는 것이 느껴졌다. 이는 로비도 느꼈는지, 잠에서 깨어 눈을 살살 비볐다. 그는 하품을 한 번 하고 창문을 통해 밖을 보려 애썼다. 그가 잔뜩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음……. 밖이 좀 어수선하네요.”

케네스는 어수선하다는 말에 커튼을 치웠다. 자신이 보는 쪽 도로에는 아무도 지나가고 있지 않아 상황을 알아차릴 수 없었다. 그래도 이곳이 백작의 저택 근처라는 건 알 수 있어 이번엔 커튼을 도로 치지 않았다. 아직까지도 어수선하다는 말이 마음에 걸렸다.

이내 마차가 멈추고 위에서부터 사람이 내려오는 듯한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로비도 이를 들었는지 걸쇠를 올리고 문을 열어서 마차에서 내렸다. 케네스도 서둘러서 그 마차에서 내렸다. 마차에서 삐그덕소리가 나는 것을 무시하고 주변을 살펴보았다. 로비가 볼 수 있던 도로에 몇몇 젊은이가 있었으나, 어딘가를 보고선 서둘러 그 도로를 벗어났다. 그들의 시선이 어디를 향하는지는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발독 저택의 대문 근처에는 붉은색으로 치장한 화려한 마차가 한 대 서있었다. 마부가 내려 대문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는 걸 보아하니, 곧 저택에 있는 사람이 외출을 할 예정인 것 같았다. 케네스는 그 사람이 혹시 백작일까 싶어 서둘러서 대문 쪽으로 갔다.

대문은 쇠창살로 되어있었기에 쉽게 내부를 볼 수 있었다. 그가 안을 들여다보았다. 비서, 혹은 집사로 보이는 사람에게 이야기를 걸고 있는 중년의 부부가 보였다. 오래 생각할 필요도 없이 그 부부는 백작 부부였다. 대화가 들릴 리는 없었지만 귀를 가까이 가져가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케네스에게 말을 걸었다. 모습을 보아하니 안에서 보초를 서고 있던 문지기인 듯했다.

“이보게! 여기가 어디인지는 알고 그런 무례한 태도를 보이는가.”

문지기는 케네스를 똑바로 바라보며 외쳤다. 그도 당당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발독 백작님께 드릴 말씀이 있어 여기까지 찾아왔습니다. 백작님은 곧 외출하십니까?”

“흥. 세상 물정도 모르는 얼간이에게 알려줄 수 있는 건 없으니, 이만 물러가라.”

세상 물정을 모른다는 말에 케네스는 흠칫 물러섰다. 누가 변명을 하든, 상대방에게 통보도 없이 갑자기 찾아온 것은 자칫 실례가 될 수 있는 행동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아랫입술을 약하게 깨물며 무어라 할지 생각하고 있는데, 제이미와 로비가 케네스의 뒤에 섰다. 제이미는 자신의 하얀 콧수염을 손가락으로 만지며 말했다.

“허허, 도련님께서 나름 사정이 있어 온 겁니다. 대뜸 찾아온 것은 무례이긴 하오나, 그만큼 급하고 중요한 사안입니다. 적어도 백작님께 손님이 왔다 전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음? 도련님이라고?”

주춤하고 있는 문지기에게 로비가 강하게 나섰다.

“우리는 달트리 저택에서 왔습니다. 앞에 계신 이 분은 달트리 저택의 소자작이신 케네스 님이시고요. 이 정도면 신분을 밝힌 거겠죠?”

그러자 문지기는 상당히 상기된 얼굴로 태도를 고쳤다. 상태를 보아하니 그저 지나가는 한 나그네 정도로 여긴 모양이었다. 케네스가 눈썹을 찡그리자 문지기는 더듬거리며 말을 꺼냈다.

“아, 아이고. 이거 정말로 실례했습니다. 다른 높으신 분들이 오는 경우는 드문지라 제가 무례한 말씀을…….”

“이거 이거, 혹시 케네스 달트리가 아닌가?”

문지기의 말을 끊고 들어오는 경쾌한 말소리에 그곳에 서있던 이들은 깜짝 놀라 목소리가 들린 쪽을 바라보았다. 언제 대화가 끝났는지 발독 부부는 문지기를 무시하고 대문까지 찾아와 케네스의 바로 코앞에 있을 정도로 가까이에 있었다. 케네스는 어서 자세를 바르게 하였다.

“백작님. 오랜만입니다.”

“그래그래. 참 오랜만이군. 그대의 외투에 있는 무늬가 없었다면 못 알아볼 뻔했어. 아, 자네 특유의 그 눈물점도 말이야. 그 케네스 달트리가 이렇게나 크다니.”

대답을 마친 발독 백작은 문지기를 호쾌하게, 그러면서도 위압적인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케네스는 그동안 자신의 외투를 뚫어져라 살폈다. 아마 발독 백작은 그의 옷소매에 놓인 자수를 보며 말하는가 싶었다.

“아니, 설마하니 케네스에게 실례를 범한 건 아니겠지.”

“그, 그게 말입니다…….”

“흥. 변명할 생각 마시게. 이미 다 들렸소.”

“죄송합니다…….”

여간 끼어들 상황이 아닌지라 아무런 말도 못 한 채 눈앞에 있는 문지기가 주눅 드는 모습을 지켜봐야만 했다. 백작은 이내 보기 좋게 웃으며 저택 밖에 있는 세 사람을 번갈아보며 물었다.

“그런데 여긴 어쩐 일로 왔는가? 달트리 자작에게 그대들이 온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는데.”

마침 잘 되었다. 케네스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빠르게 말했다.

“제가 급히 드릴 말씀이 있어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아무런 말씀도 없이 이렇게 찾아온 것은 정말 죄송합니다만, 혹시 시간을 내어주실 수 있나요?”

백작은 그의 하얀 눈썹을 한 쪽만 올리며 케네스의 얼굴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그러고는 무언가 짐작 가는 게 있는 눈치였으나, 애써 모르는 척을 하며 웃었다.

“그대가 말이오? 자작이 아니라?”

“네. 제가 꼭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지금이어야 하나? 그렇게 급한가?”

“네. 급합니다. 지금이 아니면 늦을 것 같습니다.”

발독 백작은 잠시 얼굴을 구기며 혀를 찼다. 그러나 금방 얼굴의 주름을 펴며 환하게 웃었다. 그런 백작의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백작 부인의 얼굴이 순간 일그러진 것을 케네스는 놓치지 않았다. 속이 울렁거리는 것을 느끼는데 백작이 이내 문지기의 어깨를 잡으며 말했다.

“뭐, 오늘 외출은 급한 것이 아니니까 말이야. 알겠네. 들어오도록.”

문지기는 적잖게 당황한 모습이었으나, 감히 그를 거스를 수는 없었다. 그는 대문을 열고 들어오는 케네스 일행과 스쳐 지나갔다. 분명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마부에게 이야기를 전하러 가는 거겠지. 그런 모습을 보며 케네스는 그저 추상적인 감상을 속으로 써 내려갔다.

집사 대신 백작의 안내를 받은 케네스는 저택 안으로 들어왔다. 오랜만에 온 곳이지만 그다지 신경 쓰이거나 흥미롭지는 않았다. 실내를 바라보며 들떠있는 것은 로비뿐이었다. 백작은 오른쪽으로 꺾더니 소파와 탁자, 그리고 벽난로가 설치되어 있는 곳으로 손짓하였다. 어렸을 적이라 잊고 있던 백작의 저택 구조가 떠올랐다. 이곳의 응접실 구조는 저렇게 사람들에게 노출되어 있는 곳이었다. 어색한 느낌은 들었으나 이런 걸 말할 필요 따위는 없었다. 그는 백작이 손짓한 소파에 가서 앉았다.

“그래서. 무슨 일로 온 거지?”

두 사람보다 먼저 가운데 의자에 앉은 백작이 깍지를 끼며 물어왔다. 심히 노출된 곳이 있게 된 그는 주변에 혹시 들을 사람은 없을까, 정말 이래도 되는 걸까 하며 걱정과 후회가 밀려들어왔다. 허나 강을 이미 건넜다는 로비의 말을 상기시켰다. 여기까지 왔다면 이야기라도 해보아야 한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만, 비비안 바이스와 앤드류 그리핀의 혼인을 권유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 이유를 묻고자 하여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백작은 매우 당황한 기색이었다. 어느 점에서 당황한 것일까? 생각지도 못한 것을 물어본 점? 두 사람이 결혼하게 될 거라는 것을 알고 있는 점? 아니면 본인이 두 사람에게 권유했다는 것을 들킨 점? 혹시 모른다. 이 모든 부분에서 놀라고 있을지도. 백작은 깍지에서 손을 풀고 다리를 꼬며 당분간 사색에 잠겼다.

“흠. 묻고 싶은 것은 많지만 그럴 여유가 없군. 나도 직설적으로 대답하자면, 별다른 이유는 없네. 그저 둘이 어울려 보였을 뿐이야.”

케네스는 얼굴을 찡그려지는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온갖 소문에 관심이 많은 백작이 케네스와 비비안의 사이를 모를 리가 없었다. 케네스는 상대의 눈을 바라보았다. 거만하게 빛나는 눈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발독 백작은 의자 팔걸이에 양 팔을 올려놓고 그를 마주 보았다. 어디 할 말 있으면 해보라는 소리를 듣는 기분이었다.

“그저 그뿐입니까? 그저 어울려 보인다는 이유로 두 사람이 혼인했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하신 겁니까?”

“그래. 고작 그뿐이었어. 그게 뭔가 문제라도 되었소?”

그렇게 묻던 백작이 갑자기 무언가 깨달았다는 것처럼 눈을 크게 떴다.

“아,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설마 그대와 비비안 양이 혼담도 오간 사이라는 게 정말이었소? 나는 단순한 소문에 불과하다고 여겼지.”

케네스는 평정심을 유지하지 못하고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본 백작은 슬며시 웃으며 그의 속을 긁기 시작했다.

“정말이었다니 놀라워. 그래도 앤드류와 비비안, 둘 중 한 명이라도 거절하면 끝날 문제 아닌가? 어차피 나의 말은 권유에 불과했으니 귀담아들을 필요 없을 텐데. 아, 설마 둘 다 받아들인 건가? 그렇다면 또 묘하군. 자신의 연인을 두고 다른 사람과 혼인하다니, 아주 기묘한 일이야.”

케네스는 그만 고개를 돌려 아무 곳이나 바라보았다. 지금 그의 말을 더 듣는다면 소리라도 질러버릴 것만 같았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을 가라앉히느라 그는 아예 옆에 앉아있는 로비의 얼굴을 보았다. 웃기게도, 한 치의 가면도 없이 바른대로 자신의 기분을 표현하고 있는 그의 얼굴을 보며 케네스는 살짝 웃음이 나왔다. 조금 전까지만 하여도 어리바리한 모습에 로비와 동행하기 꺼렸으나, 지금은 그가 같이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약간은 마음이 진정되어 다시 백작을 보았다. 그는 기이할 정도로 즐거워 보였다.

“앤드류의 의사는 아직 모릅니다만, 비비안은 받아들였더군요. 저는 이것이, 본인보다는 주위의 사람을 배려한 훌륭한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슨 뜻이지?”

“정략결혼에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는 듯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그의 마음을 돌리고 싶습니다만, 그가 저를 배려한 만큼 저도 배려해야 하는 거겠죠.”

이번에는 발독 백작이 언짢다는 것처럼 턱을 괴고 눈을 치켜떴다. 케네스는 침묵 속에서 그가 어떤 말을 할지, 또는 내가 무언가를 말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나 곧 백작이 껄껄 웃으며 원래대로 팔걸이에 양 팔을 올렸다.

“하기야 정략결혼은 무언가에 이득이 되니까 하는 것이지. 두 집안에 찾아올 이득을 고려한 멋진 선택이군.”

그가 또다시 비꼬는 듯한 말을 하자 케네스는 기가 찼다. 백작은 케네스의 반응 따위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옆에서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백작 부인의 손을 휩 잡아챘다.

“알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실은 우리도 정략결혼으로 부부가 된 것이지. 하지만 말만 정략결혼이지 이렇게 사이가 좋지 않나?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게. 둘은 알아서 금실 좋은 부부가 되겠지.”

하며 큰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큰 웃음소리를 배경으로 백작 부인의 표정이 케네스의 눈에 들어왔다. 급격히 일그러지다 못해 혐오감으로 가득 찬 얼굴을 보고 있자 케네스는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케네스를 포함한, 그러나 백작을 제외한 모두가 몸을 움츠리며 놀랐다. 발독 백작이 자신의 부인의 손을 느릿하게 놓으며 물었다.

“갑자기 왜 그러지? 그리 급하게 일어나고 말이야.”

케네스는 어금니를 악물며 바닥과 허공 사이를 보았다. 아직 마음은 진정되지 않았다. 그래도 이곳에 더 오래 있기보다는 벗어나는 것이 스스로에게 좋을 거라는 판단이 들었다. 그는 입꼬리만 올리며 미소를 지어보았다. 사실 제대로 지어지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아무래도 이 질문은 백작님께 해서는 안 될 것 같군요.”

“음? 벌써 결론이 난 건가? 좋은 답변을 주지 못해 미안하게 됐어.”

제이미와 로비도 그냥 소파에서 일어나 잠시 눈치를 보다가 그의 뒤를 뒤따라갔다. 언제부터인가 문 옆에서 기다리고 있던 비서가 문을 잡아 열어주는데, 백작이 케네스를 불러 세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욱하는 마음에 무시할까도 했었지만, 가문의 체면을 위해서라면 그럴 수 없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정 물어볼 사람이 없으면 그리핀 자작에게 물어보지 그런가. 나는 남이지만 그는 그 문제의 당사자나 마찬가지니까.”

그러면서 또 뭐가 즐거운지 낄낄거리며 웃었다. 케네스는 마음에도 없는 감사 인사를 건네며 백작 부부를 바라보지도 않고 저택 문을 나섰다.

나가는 길에는 아까 만났던 문지기가 작별 인사를 건넸다. 그도 짧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찰나의 순간 그는 문지기의 안색을 살피었다. 주눅이라 해야 할까? 아까보다도 새파랗게 질린 얼굴에 그림자까지 져서, 슬프다 못해 비참해 보이기까지 했다. 케네스는 문지기를 지나치면서 짧게 말을 건넸다.

“항상 수고하십니다.”

문지기가 어떤 반응을 하든지간에 신경 쓰지 않고 그대로 대문을 빠져나왔다. 마차는 아까 있던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달라진 게 있다면 두 마리의 말들이 잠들어 있던 것뿐이었으나, 제이미가 깨우면서 사실상 달라진 부분이 없다고 봐야 했다. 제이미는 마차에 오르기 전 케네스의 의견을 물었다.

“이대로 돌아갈까요?”

그러자고 답하고 싶었지만 쉽게 입이 열리지 않았다. 그는 마차에 기대어 생각해 보았다. 이대로 가기에는 아무런 수확이 없었다. 그러다 백작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의 말처럼 이 문제의 당사자가 비비안 말고도 더 있었다. 그는 기댔던 몸을 일으켜 세우고 제이미에게 말했다.

“그리핀 저택으로 갑시다. 자작님과 이야기를 좀 해봐야겠습니다.”

제이미는 고개를 끄덕이고 마차에 올랐으나 로비는 그러지 못했다. 백작을 비판하는 말투로 케네스에게 무언가를 따지려 했다. 그러나 이미 결정을 내린 케네스가 계속해서 타라고 손짓만 했기에, 결국 말을 잇지 못하고 마차에 올라탄 것이었다.

그리핀 자작의 저택은 백작의 저택과 상당히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었다. 그럼에도 시골 마을에 있어 길이 험하여, 도심가에 있는 백작의 저택으로 갈 때보다 더더욱 피곤함이 느껴지는 여행길이었다. 금방 도착할 수 있으니 다행이었지만, 집으로 돌아갈 때를 생각하니 골치가 아팠다.

1시간 만에 마차에서 내려 주위를 살폈다. 역시나 한적한 시골마을이어서 지나가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그 대신 지나가는 닭 한 마리는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로비가 그 닭을 보고선 주인을 잃어버린 게 아닌가 하며 호들갑을 떨어서 잊을 수가 없었다. 심지어는 로비는 그 닭을 본 뒤로 호기심이 생겼는지, 열심히 두리번거리며 다른 동물은 없나 구경하였다. 케네스는 혹시라도 로비가 한눈판 사이 다른 곳으로 가지는 않을까 걱정되어 그를 지켜보았다. 그 사이 제이미는 저택의 상황을 파악하고 돌아왔다. 딱히 기대해도 좋을 만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도련님. 그리핀 자작님이 계시는지 여쭈어 보았습니만, 운이 나쁘게도 지금은 외출을 하셨다고 합니다.”

그러고 보니 백작도 외출을 한다고 했었지. 둘이 만날 약속을 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으나, 아무리 의심해 보았자 상황이 바뀔 리 없었다. 그래도 희소식은 있었다. 그리핀 자작이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다는 거였다. 지금 따라가면 잠시의 시간이라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길을 떠나는 사람을 붙잡는 것도 상식적인 선택은 아니었다. 그가 콧등을 엄지와 검지로 약하게 꼬집으며 고민하고 있는데, 갑자기 저택 안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누군가를 말리는 듯한 목소리가 여럿 들려왔다.

대문 안을 곁눈질하던 제이미의 눈이 크게 뜨였다.

“케네스 씨!”

이 동네치고는 강한 억양이었다. 그리고 케네스는 이 억양을 옛날에 들어봤으며, 아직까지도 익숙하게 들려왔다. 피로에 어두웠던 케네스의 얼굴이 살짝 펴졌다. 그가 대문을 통해 저택을 들여다보니 메이드 둘이서 젊은 청년을 붙잡고 있었다. 그러나 청년은 그 둘을 저지하고 대문까지 한걸음에 달려왔다. 케네스의 옛 친구, 앤드류였다.

“오랜만이네요. 그동안 건강하셨나요?”

“아, 그럼. 그대도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야.”

연약한 꼬맹이 같았던 앤드류가 이제는 건장한 성인 남성의 체격 정도로 성장해 있었다. 비록 지금도 케네스보다도 키가 작았지만, 훌쩍 큰 키를 보며 케네스는 다소 어색함을 느꼈다.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인지……. 한 번은 아버지께도 케네스 씨를 보러 가고 싶다고 떼를 쓴 적이 있었죠. 아버지께서는 바쁘니 그럴 수 없다고 거절하셨지만요.”

그래도 앤드류는 여전히 해맑은 미소를 가지고 있었다. 그의 미소에 안정감을 느낀 케네스는 경직된 몸을 풀었다. 그도 대략 지금까지 만나러 가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을 건네며 고개를 숙였다. 앤드류는 빠르게 손사래를 치고는 물었다.

“그런데 여기는 어쩐 일이신가요? 보아하니 달트리 자작님은 안 오신 것 같은데.”

그제야 케네스는 본론을 떠올리고 다시 표정을 굳혔다. 앤드류는 아직 케네스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얼굴빛만 보고도 밖에서 나눌 정도로 간단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는 뒤에서 어정쩡하게 서 있던 메이드 두 명을 불러 손님을 대접하기를 부탁했다. 생각과는 다른 방향이었으나, 그래도 수월하게 일이 해결되는 분위기에 케네스는 마음을 놓았다. 하지만 마음껏 기뻐하지는 못했다. 무언가 언짢은 기분이 들어서였다.

오랜만에 들어선 그리핀 저택은 옛 모습과 너무나도 달라져 있었다. 예전의 이 저택은 소박하고 검소한 인테리어였다. 그러나 지금은 휘황찬란한 샹들리에며, 길게 늘어진 녹색 카펫이며, 하나같이 보석이 들어있는 장식장이며. 전부 상상조차 하지 못하던 가구였다. 이번에는 케네스도 로비와 같이 실내를 구경하며 걸을 수밖에 없었다.

잠시 멈춰 선 앤드류가 싱겁게 웃었다.

“케네스 씨는 처음 보는 거죠? 옛날이랑 많이 바뀌었죠. 사실 이 인테리어도 순식간에 바뀐 거라서 저도 적응을 잘 못했어요.”

그렇게 말하는 앤드류는 분명 웃고 있었으나 찝찝해 보이기도 했다. 케네스는 이에는 무언가 사정이 있을 것이라 여겨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가 가는 길을 따라 걸었다.

응접실도 옛날과는 많이 달라져있었다. 케네스는 소파에 앉으며 저런 으리으리한 조각상이 있던가? 하며 손가락으로 턱 부근을 쓸었으나, 곧 메이드가 대접해 준 따뜻한 커피를 보고 정신을 차렸다. 앤드류는 얼굴을 붉히며 커피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케네스는 그조차도 거북하게 느껴져 눈을 질끈 감았다. 이를 놓칠 앤드류가 아니었다.

“아하하……. 이상하죠? 옛날에는 커피 잘 못 마셨었는데. 지금은 아버지가 원하시는 대로 설탕 없이 마실 수 있게 되었어요. 아직도 엄청 쓰지만.”

케네스는 흠칫 고개를 들어 앤드류를 보았다. 방금 분명히 ‘아버지가 원하시는 대로’라는 말에 힘을 주었던 것 같았다. 허나 타인의 일에는 감히 말을 얹지 못하는 법이었다. 그는 모르는 채하며 상대방과 똑같이 커피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빠르게 퍼지는 쓴맛이 역시 그의 입에는 잘 맞았다.

“그리핀 자작님은 외출하셨다 들었는데.”

“예. 아버지께 드릴 말씀이 있다면 제가 전해드릴게요.”

“아니, 전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어서. 답을 들었으면 한다만.”

앤드류는 생각에 빠진 듯 고개를 숙여 턱을 엄지로 살짝 받쳤다. 그리고 곧장 답을 찾은 듯 자세를 바르게 되돌렸다.

“제가 답을 드릴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알고 있는 거라면 전부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고는 언제 말해도 상관없다는 것처럼 올곧은 눈으로 케네스를 바라보았다. 속이 울렁거렸다. 그의 눈빛이 이렇게 바르게 느껴진 것은 처음이었다. 그는 입술 안쪽을 잘근잘근 씹었다. 아까 마셨던 커피 향이 아직도 느껴졌다.

“곧 결혼한다고 들었는데 말이야.”

케네스는 아차 싶었다. 불편한 마음에 신경이 곤두선 나머지, 대뜸 본론부터 꺼내고 만 것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사이가 좋았던 벗인데 너무한가 싶어 살짝 눈만 움직여 앤드류를 보았다. 예상대로 앤드류는 한껏 이상한 얼굴을 하고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었다.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상황을 수습해야만 했다.

“음. 너무 대놓고 말했나? 아니, 원래 이러려던 건 아니었어. 그러니까. 아, 이렇게 말하려던 정말 아니었는데…….”

케네스는 예민해지면 머릿속에 있는 걸 무심코 내뱉는 버릇이 있었으나, 버릇에 비해 그 상황을 돌이킬 순발력은 확연히 뒤떨어지는 편이었다. 순발력은 오히려 정처 없이 떠도는 말을 듣고 있는 앤드류 쪽이 더 뛰어났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케네스의 말을 대략적으로 짚어주었다.

“너무 그러지 마세요. 전 괜찮습니다. 일단 방금 말씀에 대답해 보자면, 맞아요. 확실한 대답은 못 드리지만 지금 혼담이 오가는 분이…… 계시기는 합니다. 그런데 그걸 어떻게 알고 계신 거죠? 아. 설마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나요? 최근에 아버지께서 달트리 자작님과 만났다고 하셨습니다. 그때 말씀드린 거로군요?”

깔끔히 그의 말을 정리하여 이해해 주는 앤드류에 케네스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감사를 표했다. 그는 큼큼하고 목을 풀고 그의 추리에 답을 알려주었다.

“아버지께서 알고 계시기는 하더군. 그런데 아버지만 알려주시지는 않았지.”

“예? 그럼 누가 알려주셨나요? 혼인에 대해 알고 있을 사람은 얼마 없을 텐데요.”

“누구긴. 당사자가 알려주었지. 그대와 혼인할 사람이 말이야.”

“…….”

앤드류는 입을 떡 벌렸다. 케네스와 비비안의 관계를 그리핀 자작은 분명히 알고 있을 터였다. 그럼에도 저런 반응인 걸 보아하니, 그리핀 자작은 자신의 아들에게 주변의 근황조차 알려주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의 반응을 살피던 케네스는 아직은 따끈한 커피를 한 모금 더 목으로 넘기고 이어 말했다.

“그대와 혼인할 사람. 즉, 비비안 바이스와 이야기를 나누었어. 참. 앤드류? 비비안을 알고는 있소? 내 생각으로는 분명 모르는 사이일 텐데. 알더라도 이름만 알겠지. 더 많이 알아도 딱 외모까지고.”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아까도 말했잖아. 당사자가 알려주었다고.”

그제야 앤드류의 머릿속에서 작은 퍼즐 조각들이 맞추어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고작 일부만 맞추어진 퍼즐은 그림의 틀조차 표현하지 못했다. 앤드류는 케네스와 그의 일행, 그리고 탁자 위에 놓인 커피잔들을 번갈아보며 말했다.

“케네스 씨는 그 비비안 양과 이야기를 나눴군요. 그러면서 제가 그분과 혼인한다는 사실을 들었다. 또한 그분과 제가 그다지 안면이 있는 사이가 아니다. 그런 것까지 알게 됐다는 건가요? 하하……. 참 난감한데요? 이건 다른 사람들에게도 비밀이라서요. 염치없는 말이라는 생각은 듭니다만, 부디 조용히 넘어가 주셨으면 합니다. 심지어는 이 저택에 있는 사람들 중에서도 모르는 사람이 있거든요.”

솔직히 누군가에게 말할 생각도 들지 않았다. 굳이 말한다고 해서 달트리 가문에도, 개인적으로도 이득을 볼 것이 없었다. 케네스가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야 앤드류는 안심의 미소를 지으며 어깨의 힘을 늘어트렸다. 그가 커피잔에 손을 갖다 대어 온도를 확인했다. 커피잔은 따끈따끈하게 그의 손을 데워주었다.

“그런데 정말 잘 알고 계시군요? 비비안 양과 친하신가 봐요?”

“아무렴. 혼담도 오간 사이인데.”

이번만큼은 의도적으로 내뱉은 말이었다. 예견은 했으나 앤드류는 커진 눈으로, 그리고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이해하지 않으려는 것처럼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더듬었다. 케네스는 씁쓸하게 웃으며 그의 말을 들었다.

“어……. 그러니까. 혼담이요? 혼담이 오갔다는 건가요? 케네스 씨가요? 케네스 씨와 비비안 양이 말인가요? 정말로?”

“그대가 기억하는 나는 타인과 관련된 일로 농담하지 않는 사내이길 바라는데. 만약 그렇게 기억하고 있다면 안심이 되는걸. 왜냐하면 지금도 그 성격은 어디 가지 않았거든.”

“아니. 허…….”

앤드류가 머리를 쥐어싸며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였다. 그가 진정될 때까지 케네스는 기다리면서 옆을 보았다. 옆에 앉아있는 로비는 앤드류와 똑같이 머리를 쥐어싸면서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 소년은 저택에서 일하게 된 지 꼬박 두 달 밖에 지나지 않았는가? 케네스와 비비안의 관계를 모를 만도 했다. 그는 무시할까도 싶었지만, 굳이 팔을 뻗어 로비의 어깨를 토닥였다. 로비는 그가 위로하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입을 떡 벌리고만 있었다.

앤드류가 허탈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전 정말로 염치없는 말을 했던 거군요…….”

앤드류는 자신의 입술을 세게 물었다. 피가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 정도로 강하게 물고 있어 보고 있는 케네스마저 눈을 가늘게 뜨게 만들었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케네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앤드류는 짧은 한숨을 내뱉으면서 입을 편하게 두었다. 빨갛게 달아오른 입술이 참으로 아파 보였다.

앤드류는 고개를 흔들며 입안으로 이래서는 안된다고 되새겼다. 그러다 갑자기 튕겨 오르듯이 일어나 굳세게 말했다. 밖에 들리지는 않을까 싶을 정도로 큰 목소리였다.

“당장 아버지께 전해야 해요! 저와 비비안 양은 대화조차 나눈 적이 없는 사이입니다. 그에 비해 비비안 양은 당신과 더욱 친밀한 관계였으니, 두 분께서 결혼하시는 게 더 자연스러운 일이죠. 제가 감히 두 분 사이를 갈라놓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요! 케네스 씨, 비비안 양도 분명 원치 않으실 겁니다. 저 또한 원하지 않으니 이 혼인은 처음부터 성립되지 않았다는 거죠! 이 사실을 어서 아버지께 전해야만 합니다. 더 늦어버리기 전에요!”

단박에 사람들을 불러 그리핀 자작이 있는 곳으로 달려갈 분위기였다. 아무리 분개할 일이 있다고는 해도, 상대방이 더더욱 분노에 휩싸여있으면 저절로 이성을 되찾게 되는 법이다. 케네스와 로비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향하고 있는 앤드류의 양 팔을 붙잡아 연행하듯이 다시 소파로 데려왔다. 앤드류는 케네스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눈빛으로 올려다보았다.

“왜 말리시죠? 케네스 씨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도대체 이게 누구를 위한 혼인이죠?”

“하……. 굳이 따지자면 발독 백작님을 위한 혼인이지. 나도 비슷한 의견을 가진 사람으로 그대를 말리고 싶지는 않지만, 지금 그대는 너무 감정적이야. 조금만 진정해 보라고.”

케네스의 말에 앤드류는 쌓여왔던 무언가를 다시 담아두려는 것처럼 천천히 심호흡을 하였다. 옛날에도 저렇게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터트릴 때가 간혹 있었다. 생판 모르는 사람이 보았을 때는 그저 인내심이 약한 사람이었을 거다. 하지만 앤드류의 넓은 마음을 알고 있는 케네스는 그가 어떤 고통을 겪었을지, 언제 저렇게 터지는지 잠시 생각해 보았다. 그러자 곧 짐작 가는 내용이 몇 개 떠올랐다. 이번에도 비슷하지 않을까 싶었다.

이런 판단이 드는 사이에 앤드류는 이미 온순해진 모습으로 얌전히 소파에 앉아 있었다. 케네스는 일어난 김에 그의 곁에 앉았다. 그는 직감적으로 이곳에 올 때까지 생각했던 것보다 많은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다고 느꼈다.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지만, 그전에 한 가지 정정해야 할 것이 있어. 일단 들어보게.”

케네스가 아예 몸을 돌려 앤드류를 바라보았다. 앤드류도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묘한 긴장감이 둘 사이에 흘렀다.

“아까 그대가 비비안도 이를 원치 않을 거라고 했었지? 제대로 물어본 건 아니지만, 나와 혼담도 오간 사이니 그도 딱히 원하지는 않겠지. 거기까지는 그대의 생각이 맞는데 말이야. 한 가지 간과하고 있는 게 있어. 비비안은 승낙을 했어. 씁쓸하게도 나와의 대화 없이 정했지만.”

앤드류가 눈을 크게 뜨고 입을 여는 것을 손을 펼쳐 막았다. 앤드류는 인상을 구기며 어쩔 수 없이 한 수 물러주어야 했다.

“처음에는 나도 어이가 없었지. 하지만 비비안은 무척이나 현명하거든. 본인에게 청해진 권유를 무시하면 생긴 일을 읽고 말았어. 이야기를 들을수록, 또 반론을 낼수록 나의 말은 무너지고 말았지. 애초에 비비안이나 그대가 나선다고 해서 바뀔 문제가 아니었던 거야. 이건 권유가 아니라 명령에 가까웠지. 좋게 말할 때 해라. 그렇지 않으면……. 상상이 가나?”

대답은 없었다. 케네스도 쿡 하고 웃었다. 그러면서 그가 어제 잠들기 전부터 이곳에 오기까지의 기나긴 여정을 덧붙여 이야기해 주었다. 어찌 보면 용기 있고, 어찌 보면 미친 듯한 그의 행동을 상상하며 앤드류의 얼굴에는 그림자가 지었다.

케네스가 말을 끝내자 방은 조용해졌다. 마치 어떤 심판을 기다리는 듯한 정적에 불편함을 느낀 그는 의도적으로 소리 내어 소파 등받이에 기댔다. 고개를 들면 천장에 매달린 조명이 보였다. 조명은 저택의 다른 것에 비해 오래되어 보였고, 소박해 보였다.

“참 답답하시겠어요.”

“내가 욕심쟁이에 겁도 없는 놈인 탓이지 뭐. 어쩌겠나?”

자조적인 말이 자꾸만 튀어나왔다. 케네스는 아까부터 자신의 상태가 미묘하게 이상하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상식적으로 행동한다 싶으면서도 또 꾸며낸 듯한 개그를 선보이려 했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건지는 자기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딱히 이를 지적하는 사람도 없어서 그는 입맛을 다셨다. 앤드류는 그의 눈치를 살짝 살피다가 이내 물었다.

“말씀은 일단 잘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물어보고 싶은 것이라는 게 무엇이죠?”

이야기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자신에게 궁금증이 있다는 것도 까먹고 있었다. 그는 그게 무엇이었는지 열심히 궁리하다가, 결국 떠올려내고는 표정을 폈다.

“그래그래. 묻고 싶었던 거. 혹시 말이야, 자작님과 다퉜나?”

그의 얼굴이 급격히 바뀌었다. 딱 봐도 어떻게 알았냐는 표정이길래 케네스는 어깨를 으쓱이며 굳이 답을 알려주지는 않았다. 다만 계속해서 턱을 괴고 이야기를 들을 자세로만 있기에 앤드류도 별다른 말없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비비안 양도 분명 그럴 거라고는 생각합니다만, 저 또한 당사자라는 입장으로 통보를 받았죠. 아버지로부터 이야기를 듣자마자 저는 거부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습니다. 그래도 아버지는 물러나지 않았죠. 사실 방금 케네스 씨가 말한 대로입니다. 좋은 말 할 때 해야 할 거다, 아니면 어떤 불이익이 우리에게 생길지 모른다, 그런 말들이었죠. 아버지는 언제부터인가 엄격해지셨죠. 너는 성장하면 가장이자 자작으로서 움직여야 한다고, 그러니 항상 자신이 존재하는 이유는 가족을 위해서라고요. 그러니 이번에도 희생하라는 소리였죠. 전 이번만큼은 그러기 싫었을 뿐이고요. 왜냐하면 이건 저만 희생하는 일이 아니잖아요?”

그는 차분한 말투와는 다르게 흥분해있었다. 말도 많이 했으니, 목을 축이기 위해 커피잔을 들었다. 약간의 소동이 일어나는 동안 다 식어버린 커피는 당장 그의 목을 축이기에는 충분한 음료가 되어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케네스 씨의 이야기를 듣고 기뻤답니다. 비비안 양과 당신이 그런 관계라면 당연히 두 분이 결혼을 하실 거고, 아버지의 선택도 무의미해지는 거니까요. 하지만 비비안 양은 정말로 생각이 깊고 이성적이시군요. 저는…… 도저히 그런 선택을 못 할 것 같은데.”

앤드류의 말 한마디마다 강한 힘이 실려 있었다. 지금까지 겪었던 분노에 대답해 주겠노라 하는 의지가 느껴졌다. 허나 결국 말뿐인 결말. 그는 그 분노를 또다시 삼켜야만 했다. 이번엔 도대체 누구를 위해서인가.

“즉, 그대 또한 강제라는 이야기로군.”

“비비안 양 또한 강제라는 말이죠. 하하.”

말로만 웃을 뿐이었지 앤드류의 얼굴은 무미건조했다. 그를 빤히 바라보며, 케네스는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물었다.

“예전엔 그래도 안 그러지 않았나? 내가 봤을 때의 그리핀 자작님은 항상 좋은 인품의 사람이었는데.”

“겉으로만 그랬죠. 타인을 위해 희생하라고는 하셨지만, 정작 본인은 살 구멍을 미리 찾아놓는 분이시거든요. 그래도 잘 해주실 때에는 잘 대해주셨답니다. 아버지가 발독 백작님께 선택받아 끌려다니시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죠. 저택 안에 들어오면서 봤죠? 널려있는 사치품이 하나같이 옛날과는 달라요. 전부 순식간에 바뀌어버렸단 말입니다.”

케네스는 그의 독설을 들으면서 그가 느꼈던 이상함의 원인을 알아내었다. 이곳에 들어서자마자 느꼈던 거북함과 묘하게 웃기려고 노력하는 말투. 전부 달라져버린 저택이 문제였다.

그리핀 저택은 다른 귀족에 비해 확연히 소박한 삶을 사는 귀족이었다. 직접 노동에 참가하는 일도 많았기에 마을 주민들과 동고동락하는 일도 많았다고 들었다. 그리고 인품도, 적어도 케네스에게는 친구의 아들이자 아들의 친구라는 위치에 어울리는 대접은 잔뜩 받아왔기에, 그에 대한 불만은커녕 그리핀 저택에 오는 것을 좋아하였다. 그랬던 저택이 지금은 반짝반짝 빛나며, 자작은 발독 백작의 뒤꽁무니를 쫓느라 정신이 없다. 이에 케네스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큰 배신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슬프게도, 배신감과 분노를 느낀 케네스는 애꿎은 앤드류에게 화풀이를 하고 있었다.

그가 자신이 느낀 감정과 지금 하고 있는 행동이 어떤 것임을 깨닫자, 공허함이 생각을 뒤따라왔다. 자신에게 억울한 일이 일어났다고 친구에게 그 감정을 부딪혀도 되는 것일까. 절대 그럴 리 없었다. 그걸 알고 있었음에도 평소의 굳은 다짐과는 다른 행동을 한 자신이 불결하게 느껴졌다. 케네스는 앤드류의 눈을 흘끗 보며 말했다. 사실대로 말할 차례였다.

“……원래는 이곳에 올 생각이 없었어. 백작님의 저택으로 가서 이야기를 나누자는 생각만 했지만, 이유 없는 모욕만 듣고 왔지. 그는 내가 나가기 전에 그대의 저택에 들러보라 일렀지. 처음에는 들은 채 하지도 않았는데, 느닷없이 이곳으로 와야겠다고 생각했어. 그때까지만 해도 나 스스로는 자작님과 대화해 보면 이득을 볼 수 있을 거라 여기는 줄만 알았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저 화풀이를 하고 싶어서 온 거였군.”

그리고 허탈하게 웃으며 눈을 감았다. 파문이 일어 혼란스러웠던 가슴 한 켠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케네스 씨도 피해자……라고 볼 수 있으니까요. 이해합니다.”

앤드류도 웃었다. 눈빛은 바닷속의 해구를 비추는 것처럼 깊고 어두웠다. 케네스는 그의 눈을 한없이 바라보다가, 이만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돌이켜보면 황당하군. 당사자들이 어찌 나설 수 없는 상황이니 내가 어떻게든 나서보려는 마음으로 이곳저곳 돌아다녀 본 건데, 당사자가 해결 못 할 문제를 어떻게 타인이 해결해 주겠어? 그냥 오늘 하루만이라도 비비안과 오붓하게 보낼 걸 그랬어.”

그는 명랑하게 웃으며 앤드류를 바라보았다. 앤드류는 오랜만에 보는 유쾌한 웃음에 입을 꾹 다물었다. 어찌 한결 나아진 표정을 한 케네스가 그의 어깨를 두어 번 토닥였다.

“그래도 와서 다행이야. 만약 오지 않았다면, 평생 앤드류 그리핀의 성장한 얼굴 같은 거 보지도 못했겠지. 이번이 마지막이 될 거라는 게 아쉬울 따름이야. 오랜만에 본 그대도 참 좋은 사람인데. 하하, 비비안에게 그대가 좋은 사람이라 일러두겠네.”

앤드류는 옷소매로 눈을 비볐다. 옷에는 진한 얼룩이 생겼다. 케네스는 억지로 웃었다. 굳이 똑같은 감정을 남들 앞에서 드러내고 싶지는 않았다. 그가 코를 몇 번 훌쩍이는가 싶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케네스의 팔을 붙잡았다. 자신을 붙잡고 있는 팔을 다른 손으로 쓸어주었다. 그가 지금 할 수 있는 최대의 위로의 표시이자, 감사의 표현이었다.

“또 볼 수 있겠죠? 아니, 볼 수 있을 겁니다. 그래야만 당신도…….”

“알고 있어. 그래, 언젠가는 가능하겠지. 그때는 또 서로 많이 성장해 있겠군. 그렇지?”

케네스의 대답에 그의 팔을 붙잡은 손에서 힘이 풀려나갔다. 그는 손이 완전히 떨어지는 것을 보고 그만 뒤를 돌아 문까지 향했다. 나가기 전, 머리만 돌려 그를 곁눈질하였다. 오른손을 들어 흔드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만 가겠어. 목욕은 물론이고, 끼니도 챙기지 못 한 채 나왔거든. 비비안과 마지막 시간을 보내야 하기도 하고.”

케네스의 말에 제이미와 로비도 허겁지겁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사람이 밖으로 나가는 케네스를 따라잡자, 케네스는 장난기가 도는 얼굴로 말했다.

“오늘 그대가 말한 독설은 오랫동안 기억해두지.”

“아, 아니요. 부디 잊어주세요. 적어도 아버지에게는 비밀로…….”

“굳이 말할 것 같나? 하하하…….”

그는 앤드류가 손을 흔드는 것을 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잘 지내시오, 앤드류.”

“도련님. 괜찮으신가요?”

저택으로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로비가 문득 말을 꺼냈다. 케네스는 대답도 못 하고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본인 스스로도 망각하고 있던 사실이 있었다. 어제저녁부터 오늘 낮까지 그는 아무런 영양분을 섭취하지 못했던 것이다. 여러 군데를 돌아다닐 때까지만 해도 멀쩡했으나, 긴장을 놓은 지금은 허기에 기운이 없었다. 옆에서는 로비가 입으로라도 위로해 주고 있었다.

“곧 도착해요! 들어가면 맛있는 점심 식사를 준비해 놓으라고 전하겠습니다!”

케네스는 거의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내뱉었다.

“먼저 씻고 싶군. 자고 싶기도 하고. 배도 고파.”

“일단 기운이 있어야 식사를 하죠.”

“그전에 꾸중을 듣는 게 먼저겠군.”

로비는 아, 하고 소리를 내며 위로를 멈추었다. 아침의 상황을 생각해 보면 지금 위로해야 할 사람이 한 명 더 있었기 때문이었다. 달트리 자작은 뛰쳐나가려는 케네스를 어째서 막지 않았냐며 혼낼 것이 분명했다. 그의 머리는 순식간에 패닉 상태가 되었지만, 부정하려 노력했다.

“그, 그래도 도련님이 책임져준다고 하셨잖아요?”

“아, 기운이 없어서 변호해 줄 수 있을지 잘 모르겠군.”

“네!? 책임져 주신다면서요!”

이제는 울 기세로 아무 말이나 빠르게 내뱉고 있는 로비를 보며 케네스는 소리 내어 웃었다. 장난이 너무 심했나 싶어 위로라도 해주려고 했지만, 로비는 그 손을 뿌리치며 케네스 쪽에 있는 창가를 가리켰다.

“이미 다 늦었어요. 보세요! 도착해버렸다고요!”

아까는 도착을 그렇게나 기다렸으나, 지금은 도착하지 않기를 빌게 되었다. 그건 케네스도 마찬가지였다. 창가를 통해 저택 입구를 보니 익숙한 얼굴의 중년 남자가 팔짱을 끼며 서 있었다. 달트리 자작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가 저렇게 턱을 내리고 팔짱을 끼고 있다는 것은 화가 많이 났다는 뜻이었다. 케네스도 그저 코웃음을 내며 식은땀을 흘렸다.

기어코 마차는 도착해버렸다. 미리 커튼을 닫아둔 케네스는 마차 문을 열기 위해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그러자 밖에서는 달트리 자작이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무어라 말하였고, 이내 마차 문도 잽싸게 열려버렸다. 케네스는 황급히 손잡이에서 손을 때었다. 역광에 자작의 얼굴은 흐리게 보였다. 그러나 그것이 문제였다. 그림자 속에서도 자작의 눈빛만큼은 번쩍하고 빛나고 있었으니 말이다.

“케네스!”

그가 한 번 움츠러들었다. 케네스가 마땅히 대꾸할 수 있는 것은 없었기에 조용히 마차에서 내리기만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자작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허나 신입 고용인인 로비의 얼굴을 본 순간, 자작은 자신의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외쳤다.

“자네까지 도대체 뭐 하는 건가! 아니, 케네스를 안 말리고 뭐 했지? 은퇴한 제이미까지 데리고 말이야!”

지금이야말로 케네스가 나설 차례였다.

“아버지. 제가 시켰습니다. 저를 호위하지 않으면 저택에서 내쫓을 거라고 말했습니다. 저 때문에 그도 끌려다닌 것이니, 그렇게 야단치지 마십시오.”

“뭐? 아니…….”

달트리 자작은 소리 없이 무언가 중얼거리더니, 곧 입을 꾹 닫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케네스와 로비의 등을 밀어 마차에서 멀어지게 한 후, 짧은 가출을 했던 세 사람을 한 번씩 보았다.

“세 사람 모두 내 방으로 오시오. 안에서 얘기 좀 합시다.”

로비가 조용히 손만 들자 달트리 자작은 눈을 질끈 감으며 그에게 발언권을 주었다.

“저, 도련님께서 어제부터 식사를 안 하셨거든요. 대화하기 전에 식사만이라도…….”

“하! 그럼 그렇게 하고 모이시오!”

그렇게 외치며 달트리 자작은 집사장의 말리는 손길을 거부하며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케네스의 입가에는 미소가 걸렸다. 두렵다는 마음은 전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유쾌한 반응에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가 웃음을 멈추려 로비에게 어깨동무하는데, 스파이크가 비비안을 데리고 그의 눈앞에 나타났다.

“거짓말 솜씨 하고는.”

“무슨 말이지?”

“변호 솜씨가 훌륭하다는 소리지.”

피식 웃는 스파이크를 보며 그도 마주 웃었다. 이제는 곁에 있는 비비안을 보았다.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를 보며, 케네스는 비비안의 뺨을 한 손으로 쓰다듬었다.

“그리 걱정할 필요 없소. 아버지와 잘 말하고 올 테니까. 대화가 끝나면 봅시다.”

비비안은 손길을 받아들이며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훗 하고 코웃음을 치며 저택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뒤에서는 스파이크의 놀리는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그는 눈길을 주지 않았다. 아, 드디어 그리웠던 집이었다.

케네스는 목욕과 식사를 마치고 아버지가 계신 방 안에 홀로 들어갔다. 처음에는 다른 사람들은 두고 어째서 혼자 들어왔냐며 자작이 따졌지만, 곧 그는 나무 의자에 앉아 한숨을 쉬었다. 그 사이에 케네스는 자신이 할 수 있을 만큼 요약하여 오늘 있었던 일을 보고했다. 달트리 자작의 얼굴에는 기막힘과 분노, 걱정, 그리고 슬픔이 차례대로 지나갔다. 케네스의 일방적인 이야기가 끝나자 자작은 조용히 방 한 바퀴를 돌았다. 그리고 결심을 말한 자신의 아들을 꼬옥 안아주었다.

“네 마음은 잘 알았다. 그래도 다시는 이러지 말거라. 오늘 일은 너무나 무모했구나.”

그는 아버지의 포옹에 포옹으로 답해주었다. 오늘 있었던 일을 전부 말하고 나니, 어느덧 저녁이 되었다. 하루 종일 피곤했던 터라 그는 방으로 돌아가 휴식을 취하려 했다. 방으로 가기 위해 아버지께 인사를 드렸다. 자작은 짧게 인사했다.

“나 때문에 미안하구나, 케네스.”

그는 잠시 아버지의 서글퍼 보이는 얼굴을 보고 케네스는 눈을 굴렸다.

“아닙니다. 아버지 때문이 아니니까요.”

좋은 밤 보내십시오. 그 한 마디로 케네스는 방을 나섰다. 복도는 아침과는 다르게 분주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지나가는 고용인들이 인사를 건네오면 그는 마주 인사를 건넸다. 10번 정도 그 일을 반복하니 어느새 자신의 방까지 도착해있었다.

자신의 방 안에 들어간 케네스는 침대에 뛰어들었다. 문득 어제도 이러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어 킥킥 웃었다.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딱히 일어날 이유도 없었으니 마침 잘 되었다. 그는 침대에 엎드려 누운 채로 눈을 감았다. 새까만 어둠이 그의 눈앞에 드리웠다.


밖에는 벌레들이 우는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 때문인지 케네스는 앓는 소리를 내며 눈을 떴다. 몸을 일으키는 동안, 몸은 뚝뚝 소리를 내며 활동을 재개할 준비를 마쳤다. 그가 크게 하품을 하며 창밖을 보았다. 지금이 몇 시일까? 하늘에서 춤을 추는 별들과 달을 바라보며, 지금이 9시와 10시 사이라는 것을 알아내었다. 아침이 늦은 달트리 저택 사람들에게 있어 지금은 아직 활동하는 시간이었다. 그는 복도에 나설까 말까 침대에 앉아 고민하는데, 밖에서 노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노크 소리는 비비안의 것이었다.

“들어오시오.”

케네스는 몸을 일으켜 사람이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그가 기대한 대로 방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비비안이었다. 그는 홍조를 띤 사랑스러운 미소로 케네스를 바라보았지만, 걱정하는 듯한 기색이기도 하였다. 케네스는 곧장 눈앞에 있는 이를 껴안았다. 그의 백색 머리카락이 비비안의 붉은 머리카락과 포개어졌다.

“걱정했소?”

“당연하죠. 자작님은 화나면 무서운 분이시잖아요.”

케네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덕분에 머리카락이 흐트러져버렸지만, 그것은 오히려 케네스가 바라는 바였다. 껴안고 있는 비비안으로부터 멀어져 그의 얼굴을 두 눈에 가득 담았다.

“내가 말없이 나간 건 걱정되지 않았나 보군.”

이번엔 비비안이 케네스의 품에 안겼다. 비비안의 체온을 더욱 잘 느끼고 싶어 눈을 감아보았다. 숨을 푹 내쉬어서 생기는 공간에는 그만큼 비비안이 들어와주었다.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그만큼 말은 필요 없었다.

짓궂은 마음이 들어 케네스는 비비안을 그대로 안아올려 침대 위에 누워버렸다. 비비안은 작게 비명을 지르는가 싶더니 다시 까르르 거리며 침대에서 일어나버렸다. 금방 떠나버리는 그를 보며 케네스는 씁쓸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대로 나가려는 건가 싶어 사과하려 했으나, 비비안은 예상외로 문을 잠갔다.

“음?”

“오늘은 방해받기 싫어서요.”

그러면서 다시 침대에 앉는 비비안을 보며, 케네스는 농담하고 싶은 마음을 꾹 눌러서 가라앉혔다. 지금 농담이라도 했다가는 비비안이 당황해할 게 눈에 선해서였다. 대신 케네스는 몸을 일으켜 비비안과 시선을 맞추려 했다. 손을 들어 그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조심히 정리해 주었다. 비비안은 그런 케네스를 내버려두고 눈을 감으며 물었다.

“그래서, 어딜 다녀왔나요? 이렇게 소중한 가족과 연인을 두고 만날 사람이라도 있었나 보죠?”

“궁금하오?”

“당연한 말씀을.”

비비안이 의외로 장난을 쳐오자 똑같이 장난을 치고 싶은 마음이 솟구쳐 올랐으나, 그에게도 알 권리는 있으니 진지한 어투로 답했다.

“잠시 백작님의 저택에 다녀왔소.”

비비안의 눈이 크게 뜨였다. 때마침 머리 정돈도 어느 정도 끝났다. 케네스는 그의 머리에서 그만 손을 떼어냈다. 비비안은 어안이 벙벙한 모습으로 자신이 들은 게 확실한 건지 되물었다. 케네스는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비비안의 얼굴이 질리는 것을 보자마자 케네스는 얼른 그의 손을 잡아주었다.

“걱정 마시오. 뭐, 별다른 소리도 없었소. 별다른 수확도 없었지만.”

“……큰일이 있었다던가 한 건 아니죠?”

“그럼. 큰일이 있었으면 돌아오지도 못했소.”

아차. 무심코 뱉어버린 유머였다. 이런 유머를 비비안이 당연히 좋아할 리 없었다. 그는 케네스가 잡은 손을 뿌리치고 케네스의 팔뚝을 손바닥으로 한 대 때렸다. 찰싹하는 소리만 컸지, 딱히 아프지는 않았다. 그래도 그를 위해서라면 아픈 시늉을 해야 할 것 같아 아무렇지도 않은 자신의 왼팔을 쓸었다.

“정말 아무 일도, 아무 소리도 안 들은 거 맞죠?”

“날 의심하지 말아주시오. 섭섭하군.”

비비안은 감이 예리한 편이었지만, 예리한 만큼의 용기는 없어 더 이상 캐묻지는 않았다. 더 캐묻는다고 하더라도 케네스는 오늘 그가 들은 모욕은 절대 말해주지 않을 작정이었다. 빨리 이 얘기는 넘기는 게 좋을 것 같아 이야기를 재촉했다.

“백작님과 짧게 인사만 나누고 곧장 그리핀 자작님의 저택으로 갔지. 아, 알고 있소? 발독 백작님의 저택과 그리핀 자작님의 저택은 꽤 가까이 있다오. 한 1시간 정도?”

그는 눈을 가늘게 떠 케네스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지만, 포기하고는 고개를 저었다.

“몰랐네요. 가본 것은 아주 옛날 일이니까요.”

“그렇겠군. 그리핀 자작님은 자리를 비웠으니 떠나려는데, 앤드류가 우리를 불러 세우더군.”

그는 눈을 재빠르게 움직여 비비안의 얼굴을 살폈다. 혹시라도 불편해할까 걱정했었지만, 다행히 아무렇지도 않은 눈빛으로 이야기에 경청하고 있었다. 무언의 허락을 받은 그는 이야기를 이었다.

“그는 옛날에 봤을 때보다 많이 컸고 그만큼 정신적으로도 성장은 했는데, 나에게 버릇처럼 경칭을 쓰더군.”

“둘은 동년배라고 했었죠?”

“그래. 그런데 아직도 날 형처럼 대하는 거 같았어. 이걸 스파이크가 알면 어떤 반응일지 궁금하단 말이지. 아무튼, 그와도 이야기를 좀 나누었지. 최근에 어떻게 지냈는지, 뭐 좋은 소식은 없는지. 또…….”

말꼬리를 늘리며 다시금 비비안의 안색을 살폈다. 추리력이 상당히 좋은 비비안은 비밀로 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것처럼 쏘아보고 있었다. 그는 할 수 없이 숨을 푹 내쉬며 이어 말했다.

“하……. 그대에 관한 이야기도 하였소. 아니, 실은 그대에 관한 이야기만 했지. 그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내가 해줄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대처럼 정략결혼을 원하지는 않더군. 그래서인지 우리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니 무척이나 기쁜 눈치였지. 그런 부당한 혼인 따위 하지 않아도 되니까.”

“하지만, 그게 그렇게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이건 가문끼리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 말대로 지. 그대의 의견을 들려주니 앤드류도 납득하더군. 그도 이미 생각은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소. 스스로 그걸 거부하고 싶었던 거고.”

케네스는 잠시 말을 끊고 자세를 바꾸었다. 시선을 오로지 비비안에게만 두고 싶어 몸을 옆으로 돌려 그를 보았다. 비비안은 고개만 돌려 케네스를 올려다보았지만, 그가 어떤 행동을 하든 간에 아무 상관이 없었다. 이건 들려주고 싶은 것이자, 말하고 싶은 것이기도 했으니까.

“내가 오늘 백작님께 간 것은, 그 어떤 수단을 이용해서든 그대와 앤드류의 혼인을 막고 싶어서 였소. 정확히는 백작님의 마음을 돌리고자 한 것이었지. 그런데 백작님은 나 따위의 것과 이야기하고 싶은 눈치가 아니었소. 내가 한 마디를 꺼내면 바로 반박하는 몇 마디가 그의 입에서 튀어나왔소. ……그래도 앤드류와는 대화할 수 있었지. 그는 나와 같은 마음이었으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그와 힘을 합치면 일이 수월하게 넘어가지는 않을까 기대했소. 하지만 아니었지. 그는 그만의 사투에서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이런 생각이 들었소. 사실 이건 처음부터 내가 끼어들 자리가 아니었던 게 아닌가,라고 말이오.”

비비안은 이미 이야기의 중간부터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그러는 이유는 죄책감일지 배신감일지 아무도 몰랐다. 몰라도 상관없었다. 이게 결론이자 비비안이 원하던 바였다. 케네스는 싱겁게 어깨를 으쓱이며 첨언했다.

“본인들도 어찌 못하는 일에, 내가 괜히 나서봤자 더 비참하게 꼬일뿐이지.”

케네스는 그만 입을 다물고 비비안의 뺨을 쓸었다. 이번에는 기대어오지 않는 것이 제법 속상했지만, 이해하려 애썼다. 아까까지만 해도 뚜벅뚜벅 소리가 나던 복도는 이제 조용해졌다. 벌써 잘 시간이 되었나 밖을 바라보려 하는데, 비비안은 자신의 뺨을 어루만져 주던 케네스의 손을 잡아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흠칫 놀라 그를 보았다. 자신의 손을 붙잡고 있는 그의 얼굴은 눈물만 흘리지 않았을 뿐. 우는 얼굴과 다름없었다. 비비안은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나 때문에 괜히…….”

그 한 마디는 비수처럼 날아와 심장에 꽂힌 것처럼 욱신거렸다. 그는 남은 팔로 비비안을 덥석 안았다. 그의 얼굴을 볼 체면이 아니었다.

“그런 말 마시오. 내가 멋대로 벌인 일 아니오. 신경 쓸 필요 없어.”

훌쩍이거나 하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울고 있지도 않았다. 그런 점이 더욱 마음을 아프게 했다. 케네스는 차라리 이 모든 것이 자신만의 착각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비비안이 자신을 미워하게 되어 떠나게 되는 것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나 또한 그를 마음 편히 놓아줄 텐데.

비비안은 자신의 새하얀 드레스에 있는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리고 새하얀 천 같은 것을 꺼내어 케네스의 손에 쥐여주었다. 이것이 무엇인가 확인하려는데 비비안이 알려주었다.

“우리가 처음 춤을 추었던 날을 기억하나요.”

손목 부분의 실밥이 조금 풀려있을 정도로 해진 장갑이었다. 케네스가 비비안과 처음 만날 날, 처음 춤을 춘 날 꼈던 장갑이었다. 인상 깊었던 재질의 장갑이라 그는 잊을 수가 없었다. 케네스는 장갑에서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맹세할게요.”

케네스는 갑작스러운 말에 다음 말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시간이 좀 지나고 나서야 비비안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제 한 평생, 당신만을 사랑하겠다 맹세할게요.”

그리고 다시 고개를 숙이는 그를 보면서 케네스는 장갑을 흡사 비비안의 손이라도 되는 것처럼 꽉 쥐었다. 결국 침대에서 일어난 그는 책상에 다가가 서랍을 열었다. 서랍 안에 가득 차 있는 편지봉투 사이에서 푸른 벨벳 상자를 꺼내어 비비안에게 다가갔다. 침대에 털썩 앉아, 고개를 숙인 그가 볼 수 있도록 상자를 열어 그의 손 근처에 두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아 그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는 몰랐다. 비비안은 떨리는 손으로 상자를 받았다. 그리고 가만히 안에 들어있는, 크기가 다른 한 쌍의 반지를 보았다.

“나도 한 평생, 그대만을 사랑하겠다 맹세하겠소.”

케네스의 손도 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런 손으로 비비안의 뺨을 감싸들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새어 나온 웃음 속에서 두 사람은 급할 것 없이 입술을 맞대었다. 평소에도 자주 했던 입맞춤이었지만, 이번만큼은 감정을 가득 담은 입맞춤이었다.

입술을 뗀 케네스는 살며시 웃으며 비비안의 입술을 손끝으로 한 번 문질렀다.

“자기 전에 재미있는 이야기 좀 들어보겠소?”

다음 날 아침, 바이스 남작의 배웅을 하러 오래간만에 저택의 사람들이 일찍 일어났다. 오늘만큼은 달트리 자작 부인도 일찍 일어나 바이스 남작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다. 자식들이 만날 수 없게 되는 것처럼, 친구가 된 부모들도 더 이상 재회를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달트리 자작과 바이스 남작은 아주 긴 시간 동안 악수를 나누면서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었다. 장난기 어린 목소리이기는 하였으나, 손에 굳세게 들어간 힘은 그들이 이 이별을 진심으로 아쉬워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부모들이 인사를 나누는 동안, 비비안과 케네스는 정원에 앉아 하염없이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무슨 이야기라도 주고받고 싶었으나 나오는 말은 없었다. 만약 지금 어떤 화제를 꺼낸다고 해도 길게 가지는 않을 것이었다. 비비안은 정원의 꽃, 아니면 바닥에 있는 나무판자를 바라보았고, 케네스는 하늘의 양 떼 같은 구름을 쳐다보았다. 우르르 몰려다니는 구름을 보며 그는 솜뭉치를 보는 것 같다는 감상을 하려고 했다. 최대한 아무 생각이나 떠올리고 싶었다.

“도련님, 아가씨.”

집사장이 부르는 소리에 두 사람 모두 같은 곳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떠날 준비가 끝난 것 같았다. 두 사람은 아직까지도 눈조차 마주치지 못하고 있었다. 정원에서 일어나는 순간에도, 저택 대문까지 걸어가는 순간까지도.

바이스 남작이 탄 마차에 비비안이 발을 들이기 전, 그는 잠깐 뒤를 돌았다. 오래간만에 마주친 시선에 케네스는 어째서인지 당황했다. 비비안은 얼굴색 하나 바꾸지 않고 말했다.

“……이만 가볼게요.”

“그래. 조심히 가시오.”

케네스는 비비안에게 너무 무신경하게 말한 건 아닌지 걱정했지만, 그가 변명하기도 전에 비비안은 마차 안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의 눈앞에서 문은 닫혀버렸다. 가족들 사이에서 케네스만 유일하게 아무 말 없이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다. 혹시라도 놓칠까 싶어 시선도 옮기지 않고.

소란스러운 배웅을 뒤로하고, 어느덧 마차는 멀어져서 저 멀리 점이 되었다. 그는 이제는 윤곽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는 마차를 끝까지 응시하며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어젯밤 비비안이 준 한 쌍의 장갑이 들어있었다. 장갑을 손으로 쥐며 이제는 나무 터널로 들어가 사라져버린 마차의 흔적을 지켜보았다. 이미 떠난 줄로만 알았던 스파이크가 곁으로 와 케네스의 등에 손을 얹었다.

코끝이 찡해지는 것을 느끼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문득 케네스의 머릿속에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혹시 비비안도 눈물을 참고 있을까? 아니면 그저 울고 있을까? 만약 울고 있다면 어서 위로해 줘야 하는데. 이제는 해소할 수 없을 궁금증을 간직한 채 케네스는 걸음을 옮겼다. 터벅터벅, 바닥에는 떨어진 꽃잎들이 회오리를 만들다 이만 떨어졌다.


두 달 후, 스파이크는 자작 부인의 손을 잡고 복도를 걸었다. 그들이 긴장한 얼굴로 복도를 거닐고 있자, 낌새를 눈치챈 메이드들도 덩달아 긴장을 하며 그 옆을 지나갔다. 두 사람은 며칠째 대화를 안 하고 있는 케네스의 방 앞에 섰다. 들어가기 전, 서로 한 번 눈을 마주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문을 벌컥 열어버린 건 스파이크였다. 어차피 노크는 해봤자 대답도 안 해주었기 때문이다.

“형. 들어간다?”

일방적으로 통보를 날린 그는 자신의 어머니를 밖에서 기다리게 하고 안으로 들어왔다.

방은 사실 평소와 똑같았다. 오히려 스파이크의 방보다 깨끗했다. 그런 방에 케네스는 의자에 덩그러니 앉아있었다. 얼굴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얼굴로 밖을 보고 있을 터였다. 스파이크는 한숨을 쉬며 그의 뒤에 섰다. 케네스의 하얀 머리는 전에 비해 많이 자라있었다.

“머리카락 좀 자르지 그래? 관리하기 힘들잖아.”

마음에도 없는 소리였다. 그 정도로 아무 말이나 꺼내어 케네스의 반응을 살피고 싶었다. 하지만 기대와는 다르게 케네스는 묵묵부답이었다. 스파이크는 고개를 돌려 문 너머에 있는 어머니의 얼굴을 보려 했다. 당연히 얼굴 따위는 보이지 않았으니 다시 자신의 형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딜 보는 거야? 하늘?”

최대한 케네스가 바라보는 곳을 알아내려 시선의 각도를 추리하고 있는데, 케네스는 오랜만에 불쑥 대답해 주었다.

“홍차 밭.”

“어?”

“잎이 좀 자란 거 같군.”

케네스의 목소리는 낮게 깔려 있었지만, 어딘가 건강이 안 좋거나 그런 느낌은 없었다. 스파이크는 어렵게 웃으며 태평하게 말해보았다.

“진짜 자란 거 맞는지, 직접 확인해 보지 그래? 여기서는 잘 모르잖아.”

한참의 정적 후에 케네스가 대답하였다.

“굳이 안 그래도 돼.”

예상대로 좋은 대답은 아니었다. 그래도 대답을 해준 것만으로도 큰 수확이었다. 스파이크는 오늘만큼은 쉽게 물러나며 다시 나가려는데, 못 보던 신문지가 책상 위에 있는 것을 발견했다. 본능적으로 손으로 집어 내용을 확인했다.

약 한 달 전의 것으로, 두 귀족 가문의 자식이 결혼했다는 내용을 대서특필로 보도한 신문이었다. 스파이크는 경악했다.

“아니, 읽었어?”

케네스는 스파이크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그는 형의 무반응 따위 아무래도 좋다는 것처럼 구구절절 이야기했다.

“누가 줬어? 아니, 생각이 없냐고. 이걸 왜 형한테 가져다준 건데? 누가 이딴 장난을 친 거냐고! 너무 심하잖아! 기자들도 너무하지. 왜 이딴 걸 제목으로 처넣은 거야. 뭐 다른 유흥거리가 없었나? 남의 연애사 말고 시민들의 불만거리나 보도할 것이지, 진짜 양심도 없다. 나중에는 아주 그냥 사람 밥 먹는 것도 신문에 쓸 판이네.”

순간 자신의 이런 반응이야말로 케네스를 상처 주는 것은 아닌가 싶어 움찔했다. 그러나 케네스는 아직까지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머쓱해진 스파이크는 그런 형의 뒷모습을 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미안.”

짧은 사과와 함께 방을 나서려고 했다. 갑자기 케네스가 고개를 휙 돌려 스파이크를 곁눈질로 바라보았다. 오랜만에 본 형의 얼굴에 스파이크는 놀란 기색을 감출 수 없었다.

“두고 가라.”

“어? 뭘.”

그는 자신이 무얼 들고 있는지 보았다. 아무리 찾아보아도 손에 들린 것이라고는 신문지뿐이었다. 그는 양팔을 들어 올리며 자신의 기분을 표현했다.

“이거? 미쳤어?”

“두고 가라면 두고 가.”

“아니, 하지만…….”

“스파이크.”

케네스의 말이 너무나도 단호하여 스파이크는 그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신문지를 도로 책상 위에 올려둔 그는 나가기 전에 케네스를 똑바로 보았다.

“식구들이 다 걱정하고 있다고. 너무 외롭게 있지 말고 얼굴 좀 비춰 봐.”

그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마 애매한 대답이라도 들은 스파이크는 만족하며 문을 열었다. 케네스는 문틈으로 걱정스러운 낯빛의 어머니를 보았다. 문이 금방 닫혔기에 아무런 인사도 건네지 않았다.

책상 위에 올려놓은 신문지를 다시 한번 읽었다. 읽는다 하여도 고작 제목을 읽는 것밖에는 못했다. 신문에는 혼인식을 올리고 있는 지인의 사진이 커다랗게 있었음에도 볼 수 없었다. 그래도 이제는 신문지가 그의 옛 연인의 근황을 알 수 있게 하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비록 구질구질한 행동일지언정 얼굴만은 보고 싶었다. 당장은 아니어도 언젠가는 꼭 볼 수 있는 날이 올 것이었다.

힘없이 책상 위에 손을 올려 신문지를 집었다. 그리고 책상 옆 서랍을 열었다. 하지만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자주 열던 첫 번째 서랍은 아니었다. 그곳에는 그의 소중한 추억이 아직도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신 맨 아래의 큰 서랍을 열었다. 안에는 신문지 몇 장이 쌓여 있었다. 그는 이번에도 서랍에 신문지를 던져 넣었다.

언젠가는 다시 볼 그날을 위해.


유료 분량은 그냥 스스로 후기 겸 비판하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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