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v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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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날은 예기치 않은 일이 잔뜩이고

KAMILL by 카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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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ND] My Wish - 메이레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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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지나치게 운이 없는 날이다. 예보에도 없었던 소나기가 매섭게 내렸다. 뒷덜미가 휑하다. 모자 없는 가죽 재킷만 덜렁 입었으니 가릴 게 있을 턱 없다. 감기에 걸릴 일은 없어도 우중충한 하늘에 먹구름이 너 오늘 각오해라, 하고 경고하는 듯하다. 이대로 확 집에 가버릴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꼭 와라. 아무개의 구차한 협박이 떠올라 푹- 한숨 쉰다. 도망가면 집 앞까지 찾아와 문을 쿵쿵 차며 전화를 울려댈 터다.

지독한 녀석이다. 그는 성정이 악한 편은 아니지만 성가신 면이 있었다. 화려한 거에 기를 못 쓰고 달려들었다. 여자는 또 얼마나 좋아하는지 매주 술자리를 주선했다. 싫다고 뻐기면 네 입은 술독이나 다름없으니 들이부어봤자 돈만 아깝다며, 온 김에 배나 채우고 살살 눈웃음치다 가면 되잖냐는 소릴 했다. 너 그런 거 잘하잖아. 이건 또 무슨. 누가 보면 저가 여자에게 살랑 꼬리 치는 여우 새끼인 줄 알겠다. 자꾸 웃음이 나는 걸 어떡하라고. 눈이 마주치면 반사적으로 웃음이 나는데. 이건 습관이란 말이다.

“끄응······.”

억울함에 눈물이 삐쭉 나올 거 같았다. 머리 위로 우수수 떨어지는 비를 막기도 귀찮아서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얼굴로 떨어진 물방울이 뺨을 타고 내려 턱으로 고였다. 눈물방울처럼 주룩주룩.

파란불을 기다리며 멀뚱멀뚱 서 있었다. 신호가 방금 바뀌었는지 맞은편 길에는 기다리는 사람도 없었다. 하나, 둘, 셋, 넷······. 하얀 빗금 칠을 다 세고도 바뀌지 않아 멍한 얼굴로 비를 맞고 있었다.

톡톡.

제 다리에 닿는 조심스러운 두드림만 아니었어도 그리 했을 터다. 아까부터 시선이 느껴지는가 했더니만 작은 움직임이 발을 동동 굴린다. 어린 여자아이다. 바지의 정강이 부근을 살며시 쥐는 거로 봐서는 아주 소심한 성격이었다. 키는··· 백이십 정도 되려나? 연약하고 작은 기척에 입꼬리가 스멀스멀 올라갔다. 앞을 보던 시선이 정확히 아이의 처진 눈가로 향한다. 곧바로 눈이 마주치자 바지를 잡았던 손이 화들짝 떨어졌다.

“이런.”

놀랐구나.

“미안해.”

무릎을 굽히니 정수리만 보여서 바짝 쭈그려 앉았다. 바닥에 떨어지며 튀어 오른 빗물이 종아리를 적셨지만 이미 쫄딱 젖은 마당에 그게 대수냐 싶다. 무슨 일이야? 내 머리에 뭐가 달렸는지 보고도 아는 체를 하다니. 이 용감한 꼬마 아가씨의 용무가 궁금해졌다. 설마 부모를 잃었나? 파출소의 위치를 가늠하며 대답을 기다리고 있자니 노란 우비를 써 퍽 병아리 같은 아이가 입술을 뻐끔댔다. 응? 머리 위로 팔을 허우적대길래 고갤 갸웃한다. 뿔? 하니까 아니란다. 비? 그제야 고개가 끄덕여진다.

“비가 왜···.”

날씨가 참 별로네요-. 그런 당연한 걸 알려주려 말을 걸었을 거 같지는 않다. 뭐가 문제일까. 입을 꾹 다물고 제 입만 뚫어지게 쳐다보는 병아리에 눈을 가늘게 뜬다. 갑작스럽게 시작된 낱말 퀴즈에 웃음이 터질 거 같았다.

그리고 왜 아까부터 말을 안 하는······―.

“아.”

말을 못 하는구나.

깨달음에 작게 탄식한다. 입 모양을 읽는 걸 봐선 듣는 것도 마찬가지다. 한 가지 의문을 해소했다. 그럼 두 번째 의문이 남는다. 이 병아리가 대체 뭘 말하고 싶은 걸까. 아리송한 표정을 짓자 다시금 발을 동동 굴린 아이가 제 노란 우비를 콕콕 찔렀다. 하하. 웃음이 터진다.

이제 알았다.

“날씨가 아니고 우산을 말하는 거였구나.”

끄덕.

“왜 비를 맞고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어?”

끄덕끄덕.

“슬프게도 우산이 없네···. 너처럼 멋진 우비도 없고.”

그러자 병아리는 서글픈 표정을 지었다. 첫 번째 단추 앞에서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길래 벗어달란 소린 아니었어, 하고 말을 붙인다. 몸을 으슬으슬 떠는 걸 보고는 삼촌은 감기 같은 거 안 걸리는데-, 하며 어깨를 으쓱한다. 귀여운 아이였다. 자세히 보니 꽤 노아를 닮았다. 멋 옛날 제 유일한 이웃사촌이던 여자아이를 떠올리자 픽 웃음이 샜다.

“밥을 잘 먹어서 몸이 아주 튼튼하거든. 그러니 꼬마 아가씨도 편식하지 말고 잘 먹어야 해. 그래야 키도 크지.”

끄덕.

“옳지. ···오늘은 비가 많이 와서 곳곳이 흉흉한데, 아가씨께선 왜 위험한 외간 남자에게 말을 거셨을까.”

입술을 삐죽이며 말을 걸자 아이의 입 동굴이 네모나게 벌어졌다. 꺄륵 소리가 날 거 같은 웃음이다. 똑같이 입을 벌려 웃으며 헤헤거렸다. 노아를 닮아선지 평소보다 자연스러운 웃음이 났다.

병아리는 품을 뒤적이더니 작은 반짇고리 같은 가방에서 수첩을 꺼냈다. 물이 튀지 않게 허릴 푹 수그리고 적길래 슬쩍 상체를 들어 기웃거린다.

[ 자상한 오빠. ]

“나는 좋게 쳐도 삼촌뻘인데.”

이것도 양심 다 죽었지만.

[ 오빠. ]

“네에.”

동글동글 귀여운 글씨체였다. 인간 나이로 일고여덟 정도 되어 보이는 여기 용감하고 상냥한 병아리께선 고개까지 도리도리하며 오빠라는 호칭을 고수했다. 고분고분하게 굴자 만족한 양 머리가 끄덕여진다. 하하! 웃음이 터지는 걸 막기 어려웠다. 정말. 이런 건 싫지 않다.

[ 여기가 어디죠? ]

“······응?”

그대로 동작이 굳어버렸지만.

“길을 잃었어?”

[ 아니에요. ]

“그럼.”

[ 여기가 어딘지 모를 뿐이에요. ]

“그게 그거잖아.”

[ 아니에요. ]

머리가 좋은 애였다. 아니라는 말을 계속 쓰기 귀찮았는지 처음 적어둔 문장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며 하고 싶은 표현을 톡톡히 했다. ···이런 건 레밀리아를 닮았네. 노아와 레밀리아라니. 이 무슨 혼종일까.

헛헛하게 빠져나간 웃음에 그렇구나, 하고 답하며 볼을 긁적인다. 빗물에 축축하게 젖은 뺨이 미지근했다. 인간이라면 진작에 온기를 잃었으리라. 이 몸은 이럴 때는 참 편하다. 항상 이렇게 편하기만 하면 좋을 텐데. ······-. 예고 없는 우울감에 이목구비가 흐물거렸다. 지금 되게 웃기는 표정이겠다.

아이를 힐긋 보다가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손을 내밀어 가만있으라며 말을 얹으려는데 작은 손이 살짝 검지를 잡아 왔다. 평이하게 일자였던 게 또다시 호곡선을 그린다. 입매가 빙글거렸다. 길을 잃은 건 본인이면서 꼭 이쪽이 길을 잃을까 잡아주는 것 같았다. 상냥하기도 해라.

주머니를 뒤적여 시계처럼 써먹는 전화기를 찾았다. 어플도 몇 개 없는 아이콘 중 수화기가 그려진 버튼을 누른다. 단말기기를 귀와 어깨에 끼우고 뒤쪽 카페를 눈짓했다. 부츠 신은 발이 찰팍거리며 빗길을 밟았다. 아이를 끌어다 카페의 가림막 앞에 세운다. 조그만 손이 차가운 게 더 방치했다간 감기를 면치 못할 거 같았다. 코코아라도 쥐여주면 좋아할까?

뚜르르-. 뚜르르-.

무심하게 울려대는 전화벨 소리는 당연하게도 기본 설정 그대로다. 저들끼리 즐겁게 떠드는 중인지 받질 않는다. 아니면 무시하는 걸 테다. 평소 휴대전화는 소품 취급이던 녀석이 전화를 거니 이 건은 분명 약속 파투내는 거라고. 얘는 왜 이럴 때만 눈치가 좋지? 쭉 눈치 없이 있어 주지.

그래도 수가 없진 않다. 잠시 손가락을 놓아달라 부탁하자 빤히 올려만 보던 눈동자가 한차례 끔뻑이더니 그새 익숙해졌단 듯이 바지를 움켜쥔다.

빠르게 키패드를 눌렀다.

토도독. 톡. 토독.

「 미안. 일이 생겼어. 」

띠리리리-!

“빠르네···.”

모르는 척 호주머니에 핸드폰을 집어넣었다. 아이를 향해 샐쭉 웃으며 자세를 맞춰 입 모양을 가리켰다.

“꼬마 아가씨. 안 바쁘면, ···오빠랑 코코아 한 잔 어때?”

끄덕끄덕!

와. 좋아한다.

비 그치면 부모 찾아줘야지.

아, 오빠는 정말 아닌 거 같은데.

나도 양심이란 게······-.

 


 

그래. 좋다 이거야. 오빠 소리 듣는다고 세상이 무너지는 것도 아니고.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운. 이놈의 운. 황소자리 최악의 운세라도 점쳤나. 그런 시답잖은 생각이 들었다. 오늘 나는 고난이 많을 예정인가 보다 하고. 인간들의 별자리운세에 하루가 좌지우지될 리 없음을 알아도 우스갯소리가 삐죽 나왔다. 원래 나쁜 일은 연속적으로 찾아오는 법이다. 때마침 들어간 카페가 인외종 혐오자의 가게인 것도 그렇고. 이 애가 길을 잃었대서, 밖에 비가 많이 와서요. 잠시도 안 되나요? 내쫓기기 직전인 상황도 그러하다. 선량해 보일 웃음을 흘려도 일그러진 가게 주인의 얼굴은 풀리지 않는다.

“쟤 인간 맞아? 아니지? 쟤도 너랑 같은, 그런 것들 아냐?”

“······이 애는 인간 아인데요. 저처럼 뿔이 달리지도 않았고. 게다가 이런 어린애가 무슨 피해를 주겠어요. 사장님. 제가 결제하고 갈 테니까···-.”

“누가 팔아준대?! 너네 같은 건 손님으로도 안 받아!”

이런. 낭패다. 살살 달랜다는 게 도리어 심기를 자극한 모양이다. 버럭 소리를 지르는 얼굴이 열을 잔뜩 받았는지 울긋불긋하다. 병아리를 등 뒤로 물리며 웃는 낯을 유지했다. 악마한테 호되게 당한 경험이라도 있나. 아니. 굳이 변명거리를 생각해줄 의리는 없지. 억울함에 입술 끝이 삐죽 나오려는 걸 참았다. 알았어요, 알았으니까, 하며 문 쪽으로 뒷걸음질 쳤다.

“나가면 되는 거죠?”

“들어왔으면 돈은 내고 가야지!”

“···여기 미술관이었어요?”

입장료가 있게? 저기, 안 판다면서요. 내 돈은 받기도 싫다며?

“뭐, 좋아요. 얼만데요?”

그냥 주고 가버리자. 그게 빠르겠다.

허탈감에 숨이 쭉 빠져나갔다. 그리고 몇 번을 언급했지만 오늘은 운이 심하게 안 좋은 날이다. 사장은 그것을 비웃음으로 착각한 모양이다. 무시당했다고 생각했을까? 그런 의도는 없었는데. 위협적으로 팔을 치켜드는 게 심상찮다. 폭력까지 쓰겠다니요. 나한테 진짜 왜 이래.

피하려면 피할 수 있다. 일이 귀찮아지는 게 흠이지. 저 팔을 붙잡았다간 때리는 거냐며, 폭력이라고 경찰을 부를 터다. 그러면 곤란해지는 건 이쪽이다. 음. 그냥 한 대 맞자. 감정이 앞서 아무렇게나 휘두르는 게 맞아봤자 아프지 않을 것이다. 고개를 살짝 틀면 모르겠지. 고민하고 있을 즘 사장이 크게 팔을 들었다. 윽, 손톱 길어. 적당히 스치게 피할 수 있겠지? 멀뚱히 날아드는 손찌검을 바라보기만 했다. 딸랑, 하고. 문 열리는 소리만 아니었어도 고스란히 얼굴로 받아냈을 거다. ···어. 외마디가 튀었다. 짙은 눈자위의 검붉은 눈동자가 화악 커진다.

“가볼게요. 나가도 되죠?”

쌩하니 등을 보였다. 답도 듣지 않고 반쯤 열린 문을 콱 움킨다. 지그시 옆얼굴에 닿는 시선을 무시하느라 식은땀이 삐질 났다.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애가 물끄러미 입 모양을 읽는 걸 두고 보기 힘든 것도 이유였다. 또 때리려 하기 전에 가야겠다. 이러다 애까지 때리겠어. 병아리를 앞으로 떠밀며 가자, 하고 밖으로 나섰다. 앞에 선 이가 선선히 물러서 주어 다행이었다. 우리 다음으로 손님 한 명이 들어가자 사장이 바깥까지 쫓아오는 일은 없었다. 깊게 한숨 쉬며 옆 건물의 현수막 아래로 폴짝 뛴다. 우르릉. 천둥소리가 요란했다. 그래 봤자 제 머릿속 사정만큼 요란하진 않을 테다.

“···작은아기씨. 이거 역시 소나기가 아닌 거 같지?”

턱에 고인 물기를 닦으며 묻자 병아리가 연신 고개를 끄덕여댄다. 날짜 하난 기가 막히게 잡았네. 헛헛하게 웃으며 그늘로 병아리를 밀어 넣었다. 부모의 번호, 사는 곳, 헤어진 장소. 전부 물어봤지만 제대로 된 건 없었다. 특색이 있는 생김새도 아니다. 모두 검은 머리 검은 눈의 인간이랬다. 미아 방지 팔찌나 액세서리도 없다. 경찰서로 갈까도 생각했다만, 이거 말이야. 딱 오해 사기 좋은 모습이잖아? 떨떠름한 시선이 손가락을 움켜쥔 아이로 향한다. 뿔 달리고 눈자위 시커먼 인외종이 애 끌고 다니는 것도 눈에 띌 텐데. 지금이야 거리에 사람이 없다지만 곧 형편이 달라질 거다.

일 났네. 경찰서 앞까지만 데려다 줘? 도망가는 건 자신 있는데.

한참을 고민하다 애를 품에 끌어안고는 계단에 앉았다. 밑이 축축하게 젖는 기분이지만 이제 와 무슨 상관인가.

“···안녕.”

그러고는 줄곧 무시하던 상대에게 고개를 까딱한다. 눈을 접어 웃었다. 또 보네요. 오늘이 날이긴 날인가 보다. 하루에 한 번 겪어도 족할 일이 한 번에 들이닥치니 말이다. 자연스러운 안부 인사에 혀를 내두른다. 참으로 뻔뻔한 상판이다. 며칠 전 저 사람에게 죽임당할 뻔했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아무렇지 않은 말투다. 다친 고양이에 비유하곤 했던 사내. 아직 사내아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앳된 얼굴. 채도 짙은 하늘색 눈동자가 구김 없이 또렷하다. 살기를 흘리지도 않고, 고통스럽게 몸을 떨어대지도 않는 멀끔한 낯이 무표정하게 시선을 보낸다. 방글방글 웃으며 시선을 부딪쳤다. 우연히 마주쳤다고만 생각했는데. 제게 볼 일이 남은 모양이다. 굽어보는 시선이 고정된다. ······음. 으음. 서늘한 날씨에도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도망갈까?

몸을 들썩이니 병아리가 슬쩍 고개를 뺀다. 졸았는지 얼굴이 다 풀렸다. 얘는 어쩌지. 일단 애를 일으켜 뒤로 숨겼다. 설마. 그동안 날 찾아다닌 건 아니겠지. 귀한 정성 들여 죽일 만큼 대단한 존재가 아닌데요, 제가.

“나 이제 죽나?”

그래서 억울하게 사내를 올려다 봤다. 어깨까지 축 늘어뜨리고 허리도 굽혔다. 얼굴이 워낙 무표정해서 표정 읽기가 쉽지 않았다. 이런 적 별로 없는데. 제 말에 멈칫하거나 방심했으면 단박에 자릴 박차고 도망갔으리라. 하지만 그는 감정 따위 모르는 인형처럼 굴었다. 아니, 조금 황당해하는 거 같기도 하고. 미간 사이가 약간, 아주 약간이지만 좁아졌다. 몸을 가만히 못 두고 살결이 흠칫흠칫 튀게 하던 살기는 느껴지지 않는다. 차라리 감정을 콱 들이붓던 때가 대하기 쉬웠다. 이쪽이 평소 모습이려나.

어렵네. 어려운 사람이야.

아리송한 태도에 고개가 절로 갸웃거린다.

“안 죽일 거면 말고. 아픈 건 싫어서.”

그는 묵묵부답이다. 잠자코 시선을 빗겨 빗방울 떨어지는 걸 내려다보자 머리통에 직격하던 시선이 옮겨가는 게 느껴졌다. 비가 내려서인지 차가운 빛이 감도는 눈동자가 도르륵 굴려 아래로 향한다. 병아리가 있는 곳이다. 똑똑하게도 밀어둔 자리에 그대로 서 있는 꼬마애. 슬쩍 몸을 옆으로 틀어 가린다. 섭섭하다. 저랑 더 얘기해요. 푸스스 웃음을 흘리자 눈동자가 슬- 움직였다. 정말이지 움직임이 적은 사람이다. 놀라는 얼굴은 꽤 귀여웠는데 무심하게만 구니 그때 표정은 다 꿈이었나 싶다.

“볼 일이 남았나요?”

며칠 만에 만난 그의 상태는 나쁘지 않았다. 터진 상처를 어떻게 처리는 제대로 했는지. 복장도 바지에 보드라운 니트 차림이다.

무엇보다 차이를 느끼는 건 마력인데. 피부로 감지되는 마력이 처음과 비교가 안 될 만큼 깊다. 얼어붙은 해수면의 내면을 엿본 기분이 들었다. 비에 섞인 찬 기운이 순도 있게 섞여들었다. 눈보라가 겉으로 보긴 고요한 것처럼. 여전하게 시선을 확 잡아끄는 사람이다. 얼굴만이 아니라 특유의 분위기가 그랬다. 바닥에 떨어져 튀기는 물방울이 그에겐 닿지 않는 것도 신비로운 분위기에 한몫을 한다. 바닥에 우수수 떨궈지는 것을 비웃듯이 서 있는 존재감을 지그시 관찰한다. 부딪치고 깨어지는 물방울이 탁한 안광에 물들었다. 특유의 계절감마저 차가운 사람이었다. 고향을 떠올리게 하는.

아.

메스꺼워.

좋지 않은 걸 상상해버렸다. 뭐든 그들과 연관 짓는 건 잘 고쳐지지 않는 나쁜 습관이다. 미안한 짓을 해버렸네. 저 사람은 아무것도 모를 테지만···. 끄응, 짧게 앓으며 고개를 무릎 사이에 처박는다. 영 내력이 생기질 않는다. 그 삭막하고도 아름다운 땅덩어리에서 뛰쳐나온 지 백 년이 넘어가는데도. 가끔은 악마와 연 없는 이들의 비슷한 생김새에도 표정이 굳어지곤 했다.

아직도 이런 꼴이면 곤란한데.

언제까지고 이러고 살 순 없잖아.

변하는 게 쉽지 않다. 정확히는 변하는 데 겁을 내고 있다. 누이가 보면 한심하다고 할 터다. 심성을 운운하며 동생 걱정에 시선도 못 떼면서 말은 고약한 것만을 골라다 퍼붓겠지. 픽-. 입 새로 바람이 빠졌다. 오랜 인연을 떠올리자 숨 쉬는 게 편해졌다. 나불나불. 기다란 머리칼을 칠렐레 흩어내며 잔소리를 퍼붓는 낯을 그리자 실없는 웃음이 터지며 고개가 들렸다.

시선은 자연스럽게 옆을 향한다. 허옇게 말라붙은 입술을 질겅 씹는 게 보였다. 아. 부주의했네. 빗물에 젖은 게 아니었어. 빗물에 옷이 들러붙은 줄 알았는데, 지그시 눈을 두고야 식은땀인 걸 알았다. 쉽게 나을 상처가 아니었는데, 튼튼한 몸에 익숙해져서 지극히 주관적인 판단을 해버렸다.

따라붙는 시선을 매끄럽게 흘려 물비린내에 가려진 땀 냄새를 육안으로 잡아낸다. 일찍이 알아차리지 못해서 미안하네. 할 말이 있어서 기다리는 게 맞나 보다. 빨리 용무를 끝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많은 거 안 바란단 말이지. 살아서 돌아가게만 해주면.

피부에 닿는 선뜩한 기운이 없는데도 노파심인지 그때의 격렬했던 경험 탓인지, 이 사람 앞에선 방심할 수가 없다. 구조된 고양이를 보듯이 상처가 늘진 않았나 몸을 아래부터 쭈욱 훑어 올리다가 눈이 마주쳤다. 가늘어지는 눈매에 멍청하게 눈을 끔뻑인다. ······. 침묵이 돌았다. 벌써 이렇게 돌아다녀도 돼요? 아직 몸 상태가 좋지 않은 거 같은데. 방금 건 절대로 희롱이 아니었다고 알리기 위해 말을 붙인다. 괜한 참견이라며 으르렁거려도 할 말 없다만 오해받는 거보단 낫다. ······. 대화가 이어지진 않았다. 날 선 시선도 날아들지 않는다. 예상대로 되는 게 없다. 만나면 곧장 가차 없이 차가운 마력이 쑤셔 박힐 줄 알았는데. 아니면 당장에 인상을 쓰고 돌아설 줄 알았는데. 보라지. 지금 나는 그 앞에 멀쩡한 꼴로 앉아있다. 심지어 상대는 퍽 심드렁한 눈길을 한다. 뭐 하나 맞아떨어진 게 없었다. 도움을 받은 데다 핏발 선 눈은커녕 무감한 파란이 시선을 고정해 목표물을 포착한 고양이처럼 나른하게 굴었다.

“너.”

그런데 놀랍게도 그가 먼저 입을 뗐다.

“아무나 믿지 마.”

짤랑.

손아귀에 열쇠가 떨어졌다. 헛바람을 삼키며 그것을 움켜쥔다.

“이거 전해주러 온 거예요?”

이제 내 집 아닌데···-.

도르륵 눈동자를 굴려 쳐다보자 남자의 시선은 저에게서 벗어나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상처투성이로 눈앞에 데굴데굴 굴러온 고양이. 검은 털이 핏물에 얽어 붙어 퍽 지저분해 보이던 길고양이. 그의 첫인상이다.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은, 내 고양이도 아니면서 성가실 만큼 눈길이 가던 남자. 일부러 그에게 눈을 두지 않고 말한다.

“이름이 뭐예요?”

어색한 건 못 참겠단 말이지.

“저는 카밀이에요.”

별로 궁금하지도 않을 테지만.

알고 있다. 묻지 않아도 되는 거였는데. 상대는 내가 억지로 쥐여주었던 것을 돌려주러 온 것뿐일 테니까. 이제 그의 용무는 끝난 것이다.

아. 역시 이건 나답지 않아.

툭툭 발에 걸리는 행동이 거슬렸다. 스스로에게 이질감이 들었다. 살갗을 벅벅 긁어 거북한 부스럼째로 뜯어내 버리고 싶다. 보지 말자. 손대지 마. 직감이 알려주고 있었다. 이걸 흔한 변덕으로 치부해선 안 된다고.

이제 그는 눈을 내리깔고 제 옆얼굴을 응시하는 중이다. 고양이 발톱에 옷이 걸린 기분이었다. 말 그대로 옴짝달싹 못 하고 굳었다. 궂은 날씨에 발이 묶여서 이도 저도 못 하게 되었다. 차라리 말 걸지 말걸. 용무가 끝난 그가 제게 관심을 둘 일은 없었을 텐데. 어쩌면 열쇠를 전해주자마자 자리를 떴을지도 모른다.

감정을 다른 거로 덮는 데는 익숙했다. 예민한 신경이 거북하다고 연신 칭얼거려도 겉으론 낯섦이나 어색함 따위 모르는 것처럼 행동할 수 있었다. 여유로워 보이는 태도로. 무엇을 당해도 가벼이 넘겨버릴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왜? 지금까지와 뭐가 달랐지?

감지하지 못한 예외다. 예외를 둔다는 게 이해 가지 않았다. 뭐가 달라. 그가 뭐가 특별해서. 우리는 고작 두 번의 만남을 가졌을 뿐인데.

그에 대해 생각하면 머리가 복잡해진다. 친근함? 동질감? 그러한 감정이 없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그와 비슷한 상대가 여태 없었던 것도 아니다. 인간이나 악마, 하물며 천적과 다름없는 존재와도 두루 지냈다. 성스럽다고 불리는 하얀 링을 머리에 달고 다니는 자들. 인간들의 찬사와 신구약, 각종 신화적 통념에 주로 등장하는 허여멀건 존재들. 추한 취급을 받는 마물의 혼혈과도 연을 통했다. 그런 ‘특별시’ 되는 존재와도 적의를 쌓는 일 없이 넘겼으면서. 그들 앞에서도 흐트러지지 않고 멍청한 낯짝으로 웃음을 샐샐 흘릴 수 있었는데. 어느 때보다 지금이 가장 자신을 가라앉히기 힘들었다. 저 감정 없는 얼굴이 제 안의 무얼 자극하는지 모르겠다. 전과 뭐가 다른지.

감정을 잠시 도려내기만 하면 모든 게 쉬워진다. 이번도 그렇게 넘기면 곧 편해질 것이다. 그런데 제 태도는 그러기 싫다고 말한다. 질렸다고. 너무 외롭다고. 혼자인 데는 진절머리났잖냐며. 아가리 속의 감정이란 것을 불쑥 토해내려 한다. 시큼한 위액이 기도를 꽉 막는 듯했다. 모조리 게워내라고.

그러니까. 왜 하필 이 사람이어야 했냐고.

알 수가 없다. 나는 그냥 이대로 있고 싶었다.

기대하면 절박해지니까. 여유로운 척···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평소처럼 겉치레 떨고 말 좀 붙이고, 그렇게 적당히 사람 좋은 척 웃어주기나 하면서. ···하하. 아무개의 말이 옳다. 인정한다. 살살 꼬리치며 상황을 넘기는 건 내 특기다. 나쁜 데 이용하지 않으니 됐지. 결과적으로 피해 본 사람도 없고. 다 살자고 하는 짓이잖아.

“말하기 싫으면 말아요.”

방긋 웃어주곤 시선을 내리깔았다. 단정한 얼굴이 얌전하니 차가운 낯이 두드러지는 기분이다. 속이 울렁거린다. 표정을 읽기 힘든 상대는 대하기 거북했다. 처음 만난 날은 모른 척하기 힘들 정도로 강렬한 기운을 풍기고 있었기에 더욱. 그때는 느끼지 못했던 감각이다.

누군가를 이토록 거북하게 느낀 적이 있던가?

내가 타자에게 이런 말도 안 되는 기분을 느낀다고?

······내가?

살기로 그득하던 낯은 어느덧 텅텅 비어선 속을 예측하기가 어려웠다. 인내가 다는 듯하다. 자리를 박차고 도망치고 싶은 걸 손아귀의 열쇠를 꾹 쥐며 버틴다. 비가 얇아졌으니 자리를 피해야지. 고작 비 몇 방울 맞는다고 감기에 걸릴 거였다면 진작 앓아누웠을 거다. 도망가자.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즘이다. 예상치 못한 답이 들려온 건.

“테오.”

내리깔았던 시선이 들렸다. 두 눈을 끔뻑이며 마주한 얼굴은 지독하게도 미형이다. 중간에 시선을 돌리는가 싶더니. 언제 다시 제 쪽을 보고 있던 건지 모르겠다. 하늘색 눈동자. 바다보다 깊고. 파도보다 무서운 눈동자.

도망갈 수 없어. 저것에게서 도망갈 자신이 없다.

오늘에야 느낀 건데. 저 눈은 바다보다 눈보라를 닮았다.

바다를 본 적도 없는 내가 얄팍한 상상력을 동원할 것도 없었다. 육체가 절절히 기억하는 폭력적인 외계外界. 모든 걸 집어삼키는 새하얗고 고요한 존재감. 그와 똑 닮았다. 저 자신은 고요하면서 제 옆의 생명체는 두려움에 벌벌 떨게 한다. 카밀 발타네가 사랑해마지않고 동시에 가공할 만큼의 양가감정을 느끼게 하는 것. 겨울의 표상이 뚝 하니 떨어졌다. 지척에서 느끼는 실재감. 두 번째 만남에서 더한 두려움을 느낀다. 속에 든 게 너무 하얘서 오히려 파랗게까지 느껴지는 눈동자에 컴컴한 눈자위가 비쳤다. 내 역안. 검은 것 사이 탁하게 자리한 붉은빛이 희미하게 떨리는 게 느껴졌다.

아. 제발, 부탁할게.

차라리 화를 내. 그때처럼 죽이겠다고 해줘.

그런 눈으로 보고 있지만 말고.

······.

위로 잔뜩 덧칠된 걸 토해냈다. 주관적인 취향을 아득히 벗어난 얼굴을 뚫어지게 보며 부디 제 얼굴이 순진하게만 보이길 바란다. 부드럽게 휘어진 눈꼬리와 함께 눈이 접히는··· 그러한 보기 좋은 웃음 따위 나오지 않지만.

뭉툭하게 느껴질 법한 말투. 짤막하고 무감한 덩어리가 툭, 뱉어졌다.

“혼자야?”

으응? 왜 수작 부리는 말투지?

“인간계에 대해 아는 건 있고?”

모르겠다.

“열쇠의 답례를 하고 싶어서.”

외로워서 미쳐버릴 거 같아.

―――구역질이 나.

곧바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얼굴 근육이 마비된 것 같다. 눈에 선하도록 그려왔던 웃음이 콱 막혔다. 알아. 덜미에 진정제 놓인 짐승 새끼처럼 굴고 있는 거. 와. 최악인데. 불쾌감에 인상이 써지는 걸 막고 팔짱 낀 팔 사이에 얼굴을 푹 묻었다. 감정이 널뛰기한다. 불안했다. 너무나도.

왜 자꾸 통제가 안 되는 거야. 왜 이러는데?

정말 미친 거야?

“······네게 내 도움이 필요할진 모르겠지만.”

차라리 이대로 질식해버렸으면.

실제로 숨이 멎었었다. 생존본능에 탁, 하니 풀려난 호흡이 허파에 가득 들어찬다. 꾹 쥔 주먹을 팔짱 껴 숨기자 그제야 사르륵 자연스러운 웃음이 났다. 대답 안 해도 돼. 강요는 아니었으니까. 느물거리며 말했다. 그가 답을 돌려주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아. 비 언제 그쳐.

그 뒤로 대화가 뚝 끊겼다. 테오는 벽에 등을 기대고 한참 허공만 봤다. 다행인 일이지. 그래서 이쪽도 벼려지는 예민함을 다듬을 수 있었다. 들쭉날쭉 튀는 감정을 다스리고 그린 듯한 웃음을 하며 옆의 아이에게 겉옷을 벗어준다. 기특하게도 오빠는 춥지 않나요, 반팔인데, 하고 묻는 병아리의 우비 쓴 머리를 쓰다듬었다. 큼지막한 손이 작은 정수리를 문지르자 머리가 손바닥에 비벼질 때마다 마구 흔들린다.

툭툭.

바지가 당겨지는 느낌에 고개를 틀었다. 병아리가 입술을 방긋방긋하며 손가락을 뻗는 게 보였다. 입? 왜 글을 쓰지 않고. 더듬더듬 모양을 읽었다. 들키기 싫은 이야기를 하듯이 양손을 입으로 모아든다. 그래서 이쪽도 잔뜩 몸을 말아 굽히고 소곤거린다.

“부모님?”

반대편 신호등에 발을 동동 굴리는 인간 둘이 보였다. 저 사람들이구나. 잘됐다. 어서 가 봐. 그러자 아이는 입술을 씰룩거리며 쭈그린 무릎을 쿡쿡 찔렀다. 인간 아이는 손가락도 말랑거린다. 간지럽지도 않은 느낌에 입술을 삐죽였다가 바라는 대로 허리를 더욱 굽힌다.

“무슨 비밀 이야기를 해주려고 이래.”

[ 오빠는 ]

“응?”

[ 웃음이 참 헤퍼요. ]

“·····그런 말은 어디서 배운 거야?”

[ 웃는 게 제일 잘 어울려요. 우는 거 말고. ]

“오빠 안 우는데?”

관찰력도 좋지. 아하하, 막힘없는 웃음이 터졌다. 어깨가 들썩거려지는 느낌에 끅끅거리니 당돌한 꼬마애가 만족스럽게 팔을 양 허리에 얹어 으쓱하는 게 보였다. 고마워. 이건 진심이다.

정말이지. 이런 인간을 만나버리니까.

이래서 인간은 미워할 수가 없다니까.

이래서 누군갈 미워하고 싶지 않다니까.

미련하대도, 나는 지금이 좋은걸.

“만나서 영광이었습니다, 병아리 아가씨.”

끄덕!

지금까지 중에 가장 격하게 고개를 끄떡댄 아이가 부모 곁으로 뛰었다. “넘어지면 어떡해-.” 하고 아이는 듣지 못할 장난을 깃들였다.

그랬지. 나는 누군갈 미워하고 싶지 않아서 도망친 거다.

거기선 모든 게 밉고 미워서 누군갈 책망하게 될까. 그게 너무 무서웠다.

누구도 미워하고 싶지 않아.

데구르. 눈동자가 구른다. 자신과 정반대의 색을 가진 이에게로.

거북해하지 말아야지.

언젠가 익숙해지겠지. 이런 것도.

조금이나마 개운해졌다. 틀어막힌 출구로 줄줄 새어 나며 조절되지 않던 감정 통제가 돌아왔다. 평소처럼 웃음이 난다. 다행스럽게도. 자연스럽게 그린 웃음이 입꼬리를 둥글게 말았다.

―――근데 저 사람, 며칠간 어디서 지낸 거야?

돌고 돌아 테오의 걱정으로 돌아왔다. 상처가 나은 걸 확인하면 부스럼처럼 남은 자책이 사라질지도 몰라. 그러면 모든 게 제자리로 가지 않겠어?

그런 생각을 했다.

조금만 더, 참견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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